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알파고와 인공지능 (2)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6. 3. 10. 05:20

본문

대학원 시절, 인공지능 중에서도 인공신경망(Artificial Neural Networks)를 전공으로 삼았던 이유는 표본 데이터를 넣어주면 미리 입력시키지 않았던 데이터도 스스로 인식(학습)하는 방법론의 높은 가능성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미리 프로그램에 여러 가지 형태의 직육면체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입력해 준 뒤 알고리즘을 돌리면 그 프로그램은 모양이 약간 다른 (직접 입력해준 적이 없는) 직육면체 이미지도 직육면체라고 인식할 수 있었다. 프로그램(기계)의 이런 인지능력은 내 주요 관심사였고, 난 신경망을 통한 기계의 학습 능력을 철학에서의 인지 문제와 연관짓고 싶었다.


표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프로그램 스스로 새로운 데이터(테스트 데이터)를 인식하는 과정을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 즉 기계 학습이라 칭했는데, 당시에는 프로그램의 정확한 학습을 위해 필요한 방대한 표본 데이터를 대학원생이 직접 제작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소속의 대학원생들은 이런 표본 데이터를 수집하고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해야 했었고(만들어야 하는 데이터의 양이 워낙 많아서 다른 대학원생들의 도움도 받아야만 했다), 이것은 인공신경망을 기반으로 하는 알고리즘의 큰 단점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지역 최소점, 노드가 많아질수록 급속히 증가하는 계산량, 과도 학습과 같은 '많은' 문제들이 있었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이 제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공신경망은 다소 퇴물 취급을 받는, 발전 가능성이 많지 않은 인기없는 이론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사실 인공지능이라는 분야 자체가 현실성 없는, 천문학 분야의 SETI 프로젝트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으니, 그 인기 없는 분야에서도 더 한물 간 취급을 받고 있던 인공신경망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꽤 이상한 것으로 비춰지곤 했다. 그런 추세를 반영하듯, 내가 공부했던 기계 학습 관련 전공서에서도 인공신경망은 짤막하게만 언급되었고, 대신에 서포트 벡터 머신(Support Vector Machine) 같은 비교적 최신 이론에 더 많은 지면과 설명이 할애되었다. 이렇듯 인공신경망은 기계 학습을 위한 여러 방법론 중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하는 이론이었지만, SNS를 등에 업고 등장한 빅데이터와 하드웨어의 급격한 발전, 그리고 계속된 알고리즘의 보완을 통해 딥러닝이란 이름으로 발전하였고, 이제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덕분에 대중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예전에 한번 언급했듯, 인공지능이라 불리는 프로그램이 계량화가 가능한 바둑에서도 결국 승리하리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바둑에서 인간을 상대로 승리하더라도 내가 큰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과거 체스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이겼을 때도 난 그 사실에 별다른 감흥을 받지 못했다. 언젠간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데, 그 승리는 인류의 패배와도, 그리고 '생각하는' 지능의 탄생과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오늘 이세돌의 패배에 상당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언젠간 인간 바둑기사가 인공지능 프로그램에게 질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우선 그날이 바로 '오늘'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고, 또 나에겐 짧은 과거로 남아있을 뿐인, 퇴물 취급을 받던 인공신경망의 빠른 성과에 놀라움과 부러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남아 있었다.


당시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이 자신의 연구 분야를 '인공지능'이 아니라 '영상처리'나 '컴퓨터 비전'이라 칭했던 것처럼, 나는 알파고 개발자들이 자신을 '인공지능' 개발자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도 인공지능이란 단어의 포괄성과 애매성을 생각할 것이고, 무엇보다 그들이야말로 사람들이 상상하는 인공지능과 현재의 성과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난 여전히 이 인공의 '지능'이라는 표현이 거북스럽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가, 오늘 내가 느낀 당혹감과 놀라움은? 아, 알고 보니 그건 내 불편한 마음의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내 당황스러운 인식의 표상이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