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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우아하고 감상적인 산책로/시

by solutus 2006. 3. 3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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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모처럼 건물 복도 한 쪽 구석에 숨어 책을 꺼내 들었다. 앞의 전면 유리창으로 소울음색 불빛이 창을 갈라 여미며 들어왔고, 그 너머론 낯익은 사내 하나가 흑백의 건물과 뒤섞여 날 바라보고 있었다.

복도의 한 쪽 뒤에서 사람들이 떠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내가 있는 것을 인식 못한 듯, 나를 비추던 하얀 등을 꺼버렸다. 여기 사람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등은 다시 켜졌다. 잠시 후 들려오는 생일 축하 노래와 사진 찍는 소리. 아 그냥 가만히 있었을 걸. 아쉬움이 양볼에 뱌비운다.

잠시 후, 불을 꺼 죄송했다며 한 여학생이 케이크를 담아 가지고 왔다. 아 괜찮은데... 그녀가 돌아갈 때 엷은 향이 느껴졌다. 아 그녀는 또 한 명의 시인이었구나. 창 밖의 사내가 허겁지겁 케이크를 집어드는 것이 보였다.

학생들이 모두 떠나간 후, 누군가 다시 들어와 등의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누구일까. 푸른 제복을 입은 나이 든 사내가 보였다. 그도 나를 보았다. 허나 그는 날 못본 듯 고개를 수그렸고 나도 그저 책을 보는 척 했다. 등은 이제 다시 켜지지 않아. 이젠 필요하지 않아. 난 나직히 소근거렸다.

잠시 후 창 밖을 다시 보았을 때, 그 사내는 밑으로 고꾸라지기라고 했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거뭇한 황토빛이 하얀 종이를 호롱불로 물들였다. 종이는 따뜻하게 타올랐고 글자들은 그 주위를 돌며 경건한 합창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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