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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 <이방인>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06. 4. 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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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소용없는 일’에 대해서 침묵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를 여기서 ‘K’라고 칭하고자 한다. K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나 편견에 맞서지 않는다. 항변을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에 대한 해명을 자주 해야 됐던 사람, 그런 사람은 이미 꽉 들어찬 오해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이해시키기란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알고 있는 있다. 오래전,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던 사람조차도 그를 불신의 태도로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 어려움은 확신이 되었다. 그 뒤로는 누군가 자신을 어긋난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K은 그저 그러는 것이다. 다신 만나지 않으면 그만인 걸. 이방인의 '뫼르소'도 어렸을 때 그와 같은 경험을 해서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말을 해본댔자 무의미한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이란 조금은 잘못이 있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 경험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이 불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은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서 K는---그래도 조금이나마---다른 사람들의 말과 태도를 어떻게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뫼르소가 살라마노 영감에게 보이는 이해심 같은 것도 어쩌면 그와 같은 발로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대중은 뫼르소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으로 향했을 때의 그 야유의 함성처럼.

뫼르소와 K의 차이점이라면, 뫼르소는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다른 말, 다른 표현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여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반면, K는 사회적 통념이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더라도 경우에 따라 그 통념대로 말하고 행동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뫼르소는 죽었지만 K는 살아남았다. 뫼르소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몰랐지만 K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변덕스런 대중과 부조리한 사회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조금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뫼르소는 연기를 할 줄 몰랐지만 K는 어떻게 행동해야 사람들의 동정을 살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고, 이방인이었지만 그들과 동화될 수 있을 것처럼 행동했으며, 덕분에 순교자로 남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살아야 할 만큼 인간의 삶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다만 죽어야 할 이유보다는 살아야 할 이유가 많아 보였고, 지금은 모르는 것을 살아가는 동안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처럼, 이 소설을 마주하면 난 여전히 당혹스럽다. 의미심장한 무엇인가가 담겨있지만 그건 물안개가 가득 차오른 호수 너머에 존재하는 것 같다.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뫼르소나 K 모두 결국 이방인이라는 존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피고인 뫼르소를 법정의 구경꾼에 불과한 것처럼 만든 검사와 변호사처럼, 사람들은 오늘도 타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해당 당사자를 불러 그의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오늘도 대중은 누군가에 대해 험담하고 질책하며 그를 죽이라는 야유를 보낸다. 그때 그는 대중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이방인이 된다. 그리고 그런 부조리한 인간과 사회에 상처받은 사람이 스스로에게마저 혐오를 품게 될 때, 그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

2006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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