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올바른 태도에 관하여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5. 11. 24. 17:40

본문

며칠 전 나는 모 인터넷 서점에 중고로 판매할 책들의 목록을 정리해서 올렸다. 그중에는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서적, 특히 대화에서의 수사적 기법에 치중하는 책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말에 반박하기 전에 먼저 칭찬을 해라>, 혹은 <사람들은 가장 마지막 문장을 제일 잘 기억하므로, 먼저 칭찬을 한 후에 반대 의견을 내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칭찬을 해라>와 같은 조언을 하고 있는 책들이다. 이 책들의 저자들은 자신들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전파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조언대로 대화하는 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재판장님>, <사랑합니다, 고객님> 혹은 <현명하신 야당 대표님의 말씀에 오늘도 감탄을 하게 됩니다>와 같은 말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때론 <난 널 사랑해> 같은 표현 역시 비슷한 목적을 위해 이용되곤 한다. 이처럼 상대방에 대한 칭찬을 서두에 던져 놓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어져 온 수사적 기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한 전략적 수법으로 이용되곤 했다. 그리하여 그 형식 안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고 설득하기 위한 전략이 득세하게 된다.

 

공자는 "바탕(質: 참된 마음)이 형식(文: 예의범절)을 압도하면 거칠고, 형식이 바탕을 압도하면 겉만 번지르르하다. 형식과 바탕을 잘 어울러야 비로소 군자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에도 마음 없이 형식에만 치우쳐 벌어지던 일들이 많았는데, 공자는 그런 행위들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바탕과 형식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형식보다 바탕이 넘치도록 하는 게 낫다>고 하였다. 공자는 이런 형태를 "강의목눌"이라고 했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다음 말을 보자:

 

"번지르르한 말과 알랑거리는 낯빛(교언영색)에 어진 마음은 거의 없다. 강직하고 의롭고 소박하고 어눌함(강의목눌)은 인에 가깝다."

 

오늘날 태도를 강조하는 많은 전략서들은 그 태도에 어떤 마음을 담아야 하는지 강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수법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에만 치중하도록 만들며 이것은 "교언영색"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그들의 그런 전략은 통했으며, 지금도 교인들의 세를 불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런 걸 보면 운동밖에 모를 것 같은 검도 선수들은 비록 학문적 성과는 없을지 몰라도 올바른 태도란 무엇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지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셈이다. 3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는 세계검도대회에서 모 선수는 편파판정에 항의하기 위해 상대방 일본 선수에게 예를 갖추는 걸 거부하였는데, 이것은 진심이 담기지 않은 상태에선 예를 갖출 수 없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난 그 선수의 모습에 거칠고 반항기 많았던 공자의 제자, 자로를 겹쳐 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칭찬(어쩌면 아부)에 자신의 기분을 누그러뜨릴 것이다. 설사 곧장 반박하는 말을 듣게 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들은 여전히 그 수사적 전략을 눈치챈다. 그리고 이것이 문제를 일으킨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적으로는 그 고전적 기법에 정면으로 대항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수법에 속아 넘어가주는 기술이 필요할 때가 생기기도 한다. 그 눈에 보이는 탐탁잖은 기술에 동일하게 응대해주는 편이 나을 때도 분명히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그런 전략을 통한 평화는 결코 오래 갈 수 없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