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정치인들의 드라마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5. 10. 30. 03:27

본문

악역 연기를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속 연기자들이 길거리에서 변을 당할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텔레비전 드라마 속에서의 모습을 진짜로 착각한 시청자들이 그 연기자에게 욕을 하거나 심지어 손찌검을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리는 걸 보면 그런 착각을 아주 소수의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나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드라마에서 착한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보면 왠지 실제로도 착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정의로운 역할만 골라서 하는 연기자를 보면 실제로도 저렇게 정의감이 넘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악역에 대한 이미지도 그러하다. '저건 연기지 실제가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텔레비전 속 연기자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다 보면 그가 보여주는 이미지가 실제 그의 실체라는 환상에 점차 사로잡히게 된다.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찬성 비율이 40%를 넘는다고 한다. 이 40%에 해당하지 않는 국민들은 어떻게 국정화 찬성 비율이 40%를 넘을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 어떤 이들은 여론조사 방법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 찬성 비율이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한 텔레비전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자. 방송국에서 한쪽의 입장을 교묘하게(진보와 보수의 패널 숫자를 일방적으로 책정한다던지, 한쪽 진영의 발언권을 줄인다던지, 반박에 대한 재반박 기회를 주지 않는다던지 등등) 옹호하는 뉴스를 계속해서 내보낸다면 시청자들의 머릿속 역시 어떤 하나의 생각이 자리잡을 수밖에 없다.

 

이런 방송을 지속적으로 보고 들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인식이 심어지게 될지 예측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찬성 44.8%라는 수치는 꾸며진 것이 아니다. 며칠 전 새누리당의 원내대표였던 유승민 의원이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했었다"고 수줍게 밝혔듯이, 고대 로마의 키케로가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기 전 동생에게 선물받았던 <입후보자 안내서-선거에서 이기는 요령>의 내용을 훌륭히 실천하고 있는 정치인과 자극적 언론사가 이런 수치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우리들의 현주소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심취한 어떤 사람이 거리에서 만난 연기자의 뒤통수를 치며 "이 악마 같은 놈! 똑바로 살아!" 하고 외치듯, 정치인들을 주인공으로 제작한 드라마에 심취한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어떤 지역을, 어떤 연령대를, 어떤 성별을, 어떤 외국인 노동자를 상대로 색깔론, 남성혐오, 페미나치, 제노포비아를 일구어 낸다. 이런 경향을 잘 알기 때문에 어떤 정치인들은 "역사학자의 90%가 좌파"라거나 "국정화에 반대는 북의 지령, 적화통일 대비용"이라는 이야기를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나중에 그 발언에 대한 사과를 하게 되더라도, 그런 내용은 보도되지 않거나 아주 스치듯이 지나가게 될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에서 방송 언론이 좌파 편향적인 보도로 국민을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모든 언론을 통폐합한 뒤 단일한 국정 언론을 만들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난 국민의 40% 이상이 그 제안에 찬성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독일 나치 정권이 라디오를 통해 했던 일,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정권이 개인 소유의 미디어그룹인 미디어셋을 통해 했던 일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