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각의 부여. 이 책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난 그렇게 말할 것이다. 남성들이 '이게 왜 성차별이야?'라고 생각할 만한 것을 '아, 성차별이었구나.'라고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정희진 씨는 남성들이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었던 차별과 희롱을 이 책에서 당당하게 써 내려갔다. 그러므로 이 책은 사람들(아마도 남성)이 자신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읽으면서 아쉬움도 많이 느낀 책이었다. 처음 한겨례21에서 정희진 씨의 강연 내용을 읽었을 때부터 느꼈던 답답함을 이 책에서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좋은 편이므로, 난 여기서 내가 느낀 그 약간의 아쉬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논설문이라는 것은 자기 주장을 하는 글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켰다. 논설문을 쓸 때는 '~인 것 같다'라는 말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상대가 반박할 여지를 남겨둬서는 안 되며, 확고하게 자신의 주장을 써 내려가야 한다고. 그러나 난 생각한다. 그런 글이야말로 남성적인 것이라고.
난 그녀, 정희진 씨의 글을 좋아하지만 그런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는 여성성에 대해 얘기했지만 그녀의 단호한 글에선 남성성이 풍겨져 왔다. 여성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받아온 불평등을 생각하면 그런 과격한 발언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을 공격하는 언어를 사용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남성들이 가한 억압의 역사. 난 그것이 완전히 의도적으로 행해졌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 몇몇 남성들은 자기들이 무의식적으로 여성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시대의 남성들은 그 남성들 위에서 군림하는 지배 계급과, 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본래 악한 인간이어서 여성을 억압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정희진 씨의 글에 많이 공감한다. 하지만 남성을 발정난 동물취급하며, 여성이 어떤 면에선 더 뛰어나고 민주적이다라고 설파하는 부분에선 실망을 느꼈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기 이전에 그들은 ---정희진 씨 스스로 누차 강조하듯---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책에서 여자는 언제나 피해자이며 남성은 오로지 가해자였다. 그렇지만 난 여성이 가해자인 경우도 무척 많이 보아왔다. 정희진 씨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핍박해 왔다고 규정하는 동시에, 여성은 남성보다 온유하고 섬세하며 인정많고 자애롭다라는 전제를 달아 놓았다. 하지만 누구나 알다시피, 모든 남성 여성이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난 권위적인 것을 싫어하며 여성들의 인권 신장 운동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 운동이 오로지 남성을 권위적이고 공격적이며 감정이 메마른, 그리고 새로운 여자가 나타나면 언제든지 뛰쳐나갈 원시적인 동물로 묘사한는 데에 급급하다면---동시에 극소수의 여성을 뺀 나머지 여성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강조한다면 난 그 주장을 편한 마음으로 환영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 그런 글이야말로 더없이 남성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극악하고 억압적인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선 강력한 주장이 보다 효과적일 테니까. 논쟁을 일으켜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 필요가 있었을 테니까. 그녀의 글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가 그런 식으로 글을 쓰도록 만든 사회의 쓸쓸한 현실을 바라보며, 글의 세세한 내용이야 어찌되었건, 이런 분들의 노력에 의해 언젠가는 보다 나은 사회가 올 거라는 기대를 하며 글을 마친다.
정희진 지음.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2005)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네(Luce Irigaray, 1934~, 서구 전통 철학의 '남근이성중심주의' 사유를 비판하는 프랑스의 페미니즘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34p
200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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