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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의 그녀를 상상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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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어린 존재 하나가 서 있었다. 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난 그 존재가 신비로운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소녀는 자신의 눈을 통해 자신의 끝없는 호기심과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소녀가, 이제 곧 이십 대의 푸르름에 뛰어들 이 소녀가 품고 있던 인식의 깊이에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그 소녀는 이미 자신의 스물 아홉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 소녀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내부에 싹텄던 자유와 그로 인해 겉잡을 수 없었던 혼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회적 약자인 여자로 태어난 걸 감사히 여기며, 낮은 곳에서 더 많은 걸 느낄 수 있게 해준 자신의 환경에 감사해 하고 있었다. 니체와 랭보, 보들레르와 전혜린, 뮈세와 루 살로메가 그녀의 정신적 사춘기를 가득 채워 나가고 있었고, 그들로부터 새로운 신비와 우울과 몽상에 대한 열망, 천재에 대한 그리움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또 그 누구보다도 격정적으로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에 그 소녀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소녀는 꼭 그러한 감성을 지녀야만 했을까. 사람들은 훨씬 더 쉽게 생각하고 그로 인해 더 행복하게 사는데. 난 아름다운 감수성을 지닌 소녀들이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는 남자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꺾이는 걸 많이 보아왔다. 내 자신부터도 그랬다. 이 소녀는 그걸 피해갈 수 있을까. 설령 그런 일을 겪고 나서도 홀로 일어설 수 있을 만큼 강하게 클 수 있을까. 만일 강하지 않다면, 이 소녀가 어린 시절부터 담아온 자유로운 정신마저도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 소녀는 그 충동과 이성의 사이를 너무나 쉽게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한 손으론 문명의 이기를 쥐고 남은 한 손으론 사막의 모래를 움켜쥐고자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소녀는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 가령 결혼에 대한 의문과 서른이 오기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느끼는 그 감정에 대한 생각들 그 모두를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는 참 어렸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때 소녀는 그 이유를 '내가 많이 성장했기에'라며 위로할 것이다. 어쩌면 그런 생각조차도 안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ㅡ그 소녀는 예술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단 한 명의 사내에게만 기억 될, 혹은 어쩌면 먼 훗날의 또 다른 소녀들이 밤을 지새우며 생각하게 될 그런 예술가가.

나의 그런 판단들이 오가는 도중에도 그녀는 말이 없는 나를 계속 침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타고난 외적 매력에 지적인 편력마저 더해진 그 소녀는 내 최초의 언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은 너무나 차분하여,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는 내게 마치 선한 자비를 베풀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언어는 소녀에게 손상을 입힐 것만 같았다. 바하만은 말했다. "사랑을 방해하지 않을 말이란 한 마디도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난 그와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일까.

이 소녀 앞에 펼쳐친 아름답고도 섬세한 길에 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 소녀로 하여금 출발하고자 하는, 더 아름다운 생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활력을 심어 줄 인간이 되기를 난 주저하였다. 순간, 그 소녀의 깊은 두 눈에서 난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 때문에 죽어갈" 한 소녀의 미래를 얼핏 보고 말았다. 이 소녀는 루 살로메가 아니었다. 이 소녀는 모든 것에서 자유로웠으나, 오직 사랑에선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다. 난 나에 대한 공포로 떨며 두려움 가득한 모습을 띤 채 그 소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자 갑자기 소녀는 갑자기 두 손을 얼굴을 가린 채 주저 앉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ㅡ울었다.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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