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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부조리적 현실에 대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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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이 있다. 이것은 가부를 명확히 나눌 수 있으며 그 진위에 의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들을 포함한다. 즉 또 다른 내가 지금 지구의 어딘가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거나, 내 눈이 지금 보고 있으며 촉각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건 의심해 볼 필요도 없이 거짓이다(거짓이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흔히 쓰는 관념을 빌어 표현하자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은 증명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세상이는 신념이라는 것도 있다. 신념은 어떤 것이 지식으로 명명되기 위한 두 가지의 최소한의 조건, 즉 진리성과 정당화를 갖추지 못할 때가 많은데, 그럼에도 개개인에게는 이 신념이 무척 중요할 수 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며 또 인정한다. 즉 어떤 이가 별자리의 운행으로 사람의 미래를 점치고 또 요행히 그것이 들어맞아 그 교세를 확장한다 할지라도, 또 어떤 이들이 티티카카 호수에는 괴수가 산다고 주장하고 또 요행히 그를 증명하는 듯한 사진이 나돌아 그 호수 앞에서 제사를 지내거나 그 괴수의 신탁을 받기 위해 예배를 올리는 사람들이 몰리더라도 나는 그들의 행위를 비난하거나 막을 생각이 없다. 그들의 행동이 나에게,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 현재, 그리고 미래에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정신적 혹은 물질적으로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난 그들의 자유로운 행위를 막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실제로 그들의 신념이 맞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난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의 신념이 지식으로 인정되면 그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비록 실제로 어떤 물질적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할지라도---그들의 그런 신념을 타인을 깔보거나 폄하하는데 사용하거나 그들의 가치가 다른 것들에 비해 월등히 위대하다고 여기는 데에 이용할 때이다. 부자가 가난한 자의 동냥통에 돈을 집어넣는 것을 커다란 선을 베푸는 일로 여기거나 고급 옷을 사입는 모든 사람들을 자본주의의 폐혜에 빠진 가련한 사람들로 여기는 것 말이다. 이런 상황이 비록 나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할지라도 나에게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주장은 돼지의 등에 날개가 달렸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견고하며 쉽게 빠져들 만큼 매혹적인 데다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조차 갑자기 선인이나 죄인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비난을 한다거나,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같다고 해서 일단 칭찬부터 하고 보는 것은 어려서부터 도덕적 교육을 받아온 나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났고, 난 그 의문을 풀기 위해 몇 년 전부터 그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밑에서 몇 년째 연구를 수행하던 제자가 찾아와 울상을 지으며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며칠 전에 출판한 책의 독자 서평들이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 독자 서평이 올라간 곳은 인터넷 서점을 양분하고 있는 거대 사이트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올라온 제자의 책에 대한 서평은 너무나 형편 없어서 그 책을 사기는 커녕 읽기조차 싫을 정도의 내용들이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간혹 가다가 괜찮은 책이라는 서평도 있었으나 너무 많은 비판적 글들 때문에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도 난 별일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넘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에서 음식점을 하고 있던 가게 주인도 찾아와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는데 음식이 자신의 입맛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짜다, 맵다, 맛이 없다, 겉보기만 그럴 듯하다'와 같은 자기 주관에만 맞는 글들을 써서 올리는 바람에 가게 매상이 뚝 떨어졌다는 것이다. "10가지 메뉴가 잘 나와도 반찬 하나가 맛이 이상하면 그것만 부각되고 만단 말입니다!" 그는 머리를 쥐어짜며 외쳤다. 그래서 난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약간의 조언을 해주기로 하였다.

그 조언은 내 연구의 간단한 결과물 중 하나였는데, 그것은 그들 역시 인터넷에 글을 쓰라는 것이었다. 요즘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가입형 블로그 하나쯤은 문제 없이 가질 수 있다. 일단 인터넷상에 그런 공간을 하나 확보한 후, 그곳에 자신 역시 글을 올리는 것이다. 난 그렇게만 하면 모든 문제가 순조롭게 해결될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수고로움을 겪어야 하는지 되물었다. "게다가 저는 글재주가 없는데 어찌해야 하는지요?" 그들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들려준 것은, 우리에게 은밀한 공간이 주어지면 그곳에서 누군가를 칭찬하기보다는 단점을 지적하는데 시간을 더 할애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 일기장에 누군가의 험담을 쓰면 썼지 칭찬에는 인색한 것처럼, 우리들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일은 공개된 공간에 있으며 우리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한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칭찬의 대상은 대개 자신의 가족, 친구, 직장 동료 정도로 한정된단 것이다. 그래야 칭찬의 효과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보는, 게다가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조차 없는 사람을 자신의 일기장에서 칭찬해봐야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와 반대로 잘 모르는 사람을 흉보는 일은 적어도 스트레스를 날려 준다는 점에서 이득이다. 사람의 목에서 헤모글로빈이 분출하고 수십 발의 총알에 사람이 넝마조각으로 변해가는 화면에 익숙한 우리들은 이제 일반적인 자극 이상의 은밀한 공모에만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일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행해질수록 유효하므로, 일기장만큼이나 은밀한 공간인 인터넷에서 누군가에 대한 칭찬보다는 누군가에 대한 흉과 허물이 넘쳐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나에게 하소연을 하러 온 이들에게 닥친 경우처럼, 누군가에 대한 칭찬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고 오로지 단점만 지적하는 사람들만 있다 보니 그 단점이 그 사람의 전부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왜 인터넷에 자신이 직접 글을 남겨야 하는지가 드러난다. 다시 말하지만, 폐쇄된 공간에서는 한쪽의 시각만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이것이 실제와는 다른 해석을 낳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아도, 실제의 사실이 아니라 기록된 사건만이 역사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사가인 E.H.카가 학생들에게 강의했던 내용처럼, 역사란 역사가의 생각에 의해 불필요한 것은 배제되고 관심의 정도에 따라 사건의 의미가 따라 부풀려지거나 축소된 사실에 불과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 대해 자신이 직접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이것은 여행기를 읽으면서 해당 문명에 대한 상세 설명이 부족하다거나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사랑 타령 빼곤 아무것도 볼 게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 그리고 액션영화를 보면서 액션 빼고는 볼 게 없다는 시청자들을 잠재우기 위해 필수적이다. 인터넷에서 불평을 늘어놓는 네티즌들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게 백과사전과 슈퍼맨이다. 하지만 그럴 수야 없잖은가?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비난가들은 그렇게 딱 마침표를 찍은 뒤 펜을 내려 놓는다. 이들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그 피해는 줄어들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축구 대표 선수가 비오는 날에도 피눈물 나게 운동하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 동영상으로 공개하고, 자신의 축구 인생에 대한 고뇌와 아픔, 앞으로의 노력을 다짐하는 글을 진지하게 써서, 그것도 매일 같이 올려 놓는다면 피파 랭킹 100위에 해당하는 나라에게 뼈아픈 패배를 당해도 이 선수는 일말의 동정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피아제가 세운 도덕적 실재론에 따르면 6세에서 10세 사이의 아동은 행동의 나쁨을 행위자의 의도보다는 오히려 그 행동의 객관적 결과에만 비추어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터넷의 탄생은 그곳에 접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6세에서 10세 사이의 아동으로 만들어버리는 결과를 낳았으므로, 축구선수가 자신의 노력을 인터넷에 올리더라도 시합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선수의 노력 여하에 관계 없이 무조건 나쁘게 평가될 우려가 있다. 또한 이 시기의 아동들은 속죄적 혹은 보상적 처벌을 선호하는데---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유리컵을 깼을 경우 그 아이에게 반성문을 쓰게 하기 보단 그 아이의 볼기를 때려 주는 처벌을 더욱 선호한다---이러한 성향에 발맞추어 인터넷을 하는 네티즌들은 누군가의 실수를 감싸기보다는 조롱하는 쪽을 선호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는 게 과연 도움이 될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네티즌들의 그런 행동은 네티즌 스스로 자신이 겨우 6세에서 10세에 해당하는 아동임을 드러내주는 효과가 있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비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자신의 약점, 그들이 일말의 동점심도 없는 결과주의자임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그렇게 비난조의 글을 쓰는 사람들 역시 자기도 언젠가 비난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들이 흔히 사용하는, 문맥에 관계없이 등장하는 이모티콘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신의 글의 강도가 조금 심하다 싶으면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다. "이런 것도 음악이라고 내놓다니, 정말 우리나라 음악은 들을 게 없는 것 같다;;; ㅎㅎ;;" 이런 식의 표현법은---움베르토 에코가 말줄임표를 자주 섞어 쓰는 아마추어 작가를 향해 말했듯이---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달라는 애교의 수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그들은 누군가에게는 강도 높은 비난을 하면서도 자기는 비난 받기를 원하지 않는 순박한 이성을 지닌 사람들이기에, 때때로 동정 어린 글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이들에게 성공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독일어로 쓰여진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을 베개 삼아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을 자는 고양이 사진을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다고 치자. 물론 그 고양이는 단순히, 게다가 아주 우연히 그 책을 배고 자는 고양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그 고양이가 철학적이라거나 인간 세계의 탐욕을 초탈한 고양이라는 느낌을, 최소한 그 고양이의 주인은 교양있는 사람일 거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실제이다. 약 2천년 전 네로가 로마를 불태우며 그 방화를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돌린 이후, 그런 일방의 소문에 의한 효과는 독일의 히틀러를 정점으로 현재 한국의 빨갱이 논쟁에까지 이르고 있다. 실제로 네로가 로마를 불질렀는가? 네로가 탄압한 기독교인들이 그를 미워하여 퍼트린 설은 아닌가? 진실은 알 수 없다. 단지 입소문을 타고 전해진 대로 우린 믿을 뿐이다. 이것이 실제이다. 인터넷 공간은 양방향이라서 멋지다고 회자되지만 한쪽에서만 글을 쓴다면 양방향은 실현되지 않는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 누구도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하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비난받는 역할을 떠안게 된 사람, 즉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 교수, 소비자를 상대하는 판매자 들 역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국정 홍보처가 왜 있겠는가? 바로 그러한 일을 위해서이다.

그들은 나의 이런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몇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제 그들은 최소한 고용인을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업적과 현실과 어려움을 나타내고자 애쓸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후 난 약간 답답하던 그 공간을 떠나 우아하고 세련된 음악이 흐르는 회원 전용 클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주 보던 한 손님에게 방금 전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러자 그는 내게 공모의 눈길을 건네며 말했다. "당연한 얘기지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하려고 나서는 모양이란. 그들이 뭐라고 비난하든 우리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랑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이 섣부른 지식으로 우리를 죽여라 살려라 하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는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게 향하며 말했다.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누군가 또 섣부른 내용으로 우릴 곤란하게 하는 모양이더군요. 그놈의 인터넷 여론이란. 하지만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우리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박사님의 말씀처럼, 어차피 그들은 철없는 아동들에 불과하니까요. 무엇보다도, 그들만 그 무기를 사용할 줄 아는 건 아니니까 말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할 차례죠." 그는 찡긋 가벼운 윙크를 보냈다.
 
브루노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시켰던 가톨릭의 붉은 불길이 이글이글 타오르며 우리의 붉은 와인을 휘저었고, 그 속에서 무신론자와, 가톨릭을 비난하는 컬트 종교와, 이미 4백년 전에 브루노는 외계인이 있음을 주장했다며 그를 신성시하는 외계인 추종자들이 함께 헤엄치며 전쟁의 붉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우리는 단숨에 그를 들이마시곤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소리 죽여 웃었다.

 

 

200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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