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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반복하지 않습니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산책로/시

by solutus 2006. 5. 29.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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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런 세계의 바깥에 서서 경계선 저편을 넘겨보다가는 그곳에서부터 다시금 자신과 세계와 언어의 낱낱의 제약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체험한 비밀을 표현하기 위해 쓸모있는 새로운 언어들을 지니고 싶어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는 살았다. 그렇다. 살아 있었다. 그 점을 그는 최초로 느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감옥 안에서 살고 있음을, 그 속에서 새로이 세계를 장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또한 곧 분노에 차게 되리라는 것을, 이렇듯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 한 가지 적응성 있는 사기꾼의 언어를 어울려 지껄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1)

 

바보같은 짓이었어. 집에 들어가 누우면서 그렇게 말한다. 왜 그런 말을 적은 거지? 그건 내가 처음에 적고자 한 얘기가 아니었잖아. 처음 컴퓨터 앞에 앉을 때부터 잘못된 선택을 한거야. 머릿속에서 온갖 상념이 떠오르더라도 그걸 곧 잊어버려야 했어. 잊어버리는 걸 아까워하지 말았어야 했어. 쓰더라도 공책에 써야 했단 말이야. 봐, 이렇게 잠도 자질 못하잖아. 밤에는 글을 쓰지 말란 말이야. 알아 들어? 아니, 생각을 아주 하지마. 그래, 그건 불가능한 것 같다. 그럼 인터넷에서 아주 도망칠 수는 없는 거야? index.php를 그냥 지워버릴 순 없느냔 말이야. 영화 「리컨스트럭션」에서 마술사가 펑하고 사라진 것처럼. 아, 그래. 넌 두려워하고 있군. 은퇴를 선언했다가 그를 번복하며 복귀를 하는 가수들처럼 되고 싶진 않은 거야. 하지만 그건 인터넷을 떠날 수 없다는 걸 전제로 하는 말이잖아? 무엇이 널 그렇게 이곳에 붙잡아 두는 건데? 분명히 말해두지만, 얻는 것보단 잃는 게 많아. 얻는 건 위선이고 잃는 건 나머지 전부야. 잊어버려. 잊으라구. 너의 욕구나 희열 따위는 이해하지만, 그런 위조된 모습에서 네가 무얼 얻을 수 있는 건 없단 말이야. 이기적으로 합리화할 생각은 말아. 그런 건 지금까지로도 충분해. 넌 글을 쓰면서 전혀 솔직하질 못해. 넌 타인을 의식해. 언제나. 알겠어?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지? 정말 벗어날 수가 없다면, 공책에 적어. 그 연필로. 그럼 누구도 알 수 없을 테고, 이렇게 밤에 잠도 못 잔 채 뒤척이는 일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면, 여느 날처럼 그렇게 엉터리 같은 생각을 떠들어대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기게 될 거야. 쉰 살까지도 여기에다 이런 짓을 할 거야? 아니잖아. 이건 잠시 지나가는 것일 뿐이야. 아니, 마음을 꾹 닫은 채 혼잣말을 하며 살라는 얘기는 아니야. 문제는 넌 이곳에 글을 적으면서 네 자신을 꾸며내기에 바쁘다는 거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이미지화해서 무얼 어쩔 건데? 넌 자비로 책을 내는 불쌍한 작가와 다름없어. 아,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자꾸 그런 식으로 꾸며대고 쓰고 나서 후회할 거라면 진작에 그만 두라고. 잊혀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 아, 그래. 오늘은 그만 두자. 아니, 앞으로 영원히 그만 두었으면 좋겠다. 끝이 없는 얘기 나도 이제 지겨워. 잠이나 자. 이젠 좀 제발 자란 말이야. 제발. 아, 바보같은 의식의 흐름.

자, 셋을 세고 난 뒤 사라지는 거야. 하나, 둘, 셋!

뭐야, 그대로야?



1) 잉게보르크 바하만 지음, 차경아 옮김.『삼십세』(문예출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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