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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우아하고 감상적인 산책로/시

by solutus 2006. 6. 1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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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이 있는데 이 병은 시베리아
농부들이 걸리는 병이라는데 날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곡괭이를 팽개치고 지평선을 향해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간다는데 걸어가다 어느 순간 걸음을
뚝, 멈춘다는데 걸음을 멈춘 순간 밭고랑에 쓰러져 죽는다는데

오르다 말고 걸어가다 마는 어떤 일생*


<당신이 농부고, 시베리아 벌판에서 홀로 외로이 살고 있는 거예요. (…) 어느 날, 당신의 내면에서 무언가 죽어버리고 말아요. (…) 하염없이 서쪽을 향하여 걸어가는 거예요. (…) 줄곧 걷다가, 그대로 지면에 쓰러져 죽고 말아요. 그게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 **> 하루키 씨는 그렇게 말했죠. 내면에서 죽은 것. 농부의 마음에서 죽어버린 건 무얼까요. 어쩜 그건 정말 일상의 지겨운 반복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고, 삶의 목적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어쩌면, 모두 같은 말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쩌면, 시베리아 농부들만 걸리는 병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렇게 죽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평생을 곡괭이질을 하며 살기 보다는. 그래서 당신이 부디 그 병의 치료약만은 만들지 않기를 바랐지요. 그렇게 태양의 서쪽으로 걸어가다 죽을 수 있도록. 하지만 어쩌면, 그렇게 서쪽으로 걸어가다, 그렇게 같이 서쪽으로 향하는 동료를 만날지도 모르지요. 그러다 친구가 되고, 그러다 어쩌면, 그 병에서 치료될지도 모르겠어요. 너무 낭만적인가요? 어쩌면, 그들은 입을 열 힘조차 없을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할지도 모르는데. 다시 그 병에 걸릴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어쩌면. 안 그래요? 장담은 할 수 없는 거니까요. 그럼 나 오늘부터 천천히 걸어야겠군요. 지평선에 보이는 저 무언가를 알아볼 수 있도록.


* 「어떤 일생」에서. 천양희 지음.『너무 많은 입』 (창비, 2005)
**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모음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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