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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 <불한당들의 세계사>, 꿈을 빌려준 여인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06. 6. 20.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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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그녀는 서른 살 정도쯤 되어 보였는데, 아주 힘들게 살아온 것 같이 보였다. 그녀는 한번도 예뻤던 적 없이, 때도 되기 전에 져 버린 꽃처럼 늙어 버린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그녀는 아주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무서운 사람 중의 하나였다.

(…)

대사는 그녀를 몹시 우러러 받들 듯 아주 열정적으로 그녀에 관해 말했다. "얼마나 그녀가 특이했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아마 당신은 그녀에 관한 이야기를 쓰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을 겁니다." 라고 대사는 말했다. 그리곤 다시 격앙된 듯한 목소리로 놀라운 사실들을 자세히 말해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그녀에 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만한 조그만 단서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럼 구체적으로 그녀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나요?" 라고 마침내 나는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요." 라고 그는 내게 실망한 듯이 말했다. "그녀는 단지 꿈만 꾸었지요.[각주:1]



마르케스는 자신을 순진한 독자라고 말했다. 그는 카프카의 '변신'을 읽으면서, 그 변신에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거나 혹은 다른 숨은 뜻을 찾아내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였기에, -사람들이 말하듯- 이 단편엔 그저 재미와 환상, 감동만이 있을 뿐, 정말 다른 뜻은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이 글을 다 읽고 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건 그저 재미와 감동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꿈 이야기가 다른 이에게 진실로 이해되지 못했다는 단절감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보단 그녀의 꿈에 관심이 있었고,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의 꿈 이야기조차도 그대로 믿지 않았다. 그녀에겐 꿈만 남아버렸다. 


그녀는 꿈만 꾸었다. 자신의 꿈이 아닌 타인의 꿈을. 그래서 그녀는 그런 결말을 맞은 걸지도 모르겠다. 늙고 초라한, 비참하게 죽음을. 그러나 꿈과 현실의 경계는 언제나 모호했다. 소설 속에서 잠깐 언급한 보르헤스의 이야기2)처럼. 그러므로 그녀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쉽사리 단정지을 수는 없지 않을까. 그녀는 꿈만 꾼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론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너무나도 사랑했을 것이다. 그렇게 늙어버릴 만큼. 그렇게 시들어 버릴 만큼. 난 이제 그녀가 불행해 보이지 않는다.


언젠가 그녀를 만나면 묻고 싶다. <당신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2006년 5월 31일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꿈을 빌려 드립니다』 (하늘연못, 20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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