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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산책로/시

by solutus 2008. 5. 14.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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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다 말았는지 하얀 운동화가 금세 축축해지고 마는 골목을 걷다가
문득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지만 보이는 것은 축축한 어둠 그 자체였다
갈 길이 먼 나를 멈추게 하는 것이 비단 환청만은 아닌지라
편의점에서 구입한 담배를 한 개비 물어 불을 붙일 때도 나는
불길이 그 가느다란 담배를 다 태워버리는 것도 잊은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분명 그것은 움직임 없는 바람이었고 그 탓에 담배는 조용히 사라져갔다
어느 날에는 집으로 가는 길을 잊어버렸고
혼자 마시는 맥주의 쌉싸름한 뒷맛도 예전 같지 않았다
거리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작은 상영관이었다
모든 사람이 주연이었고 조연이었으며 단역이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 밤이 깊을수록 더욱 선명해졌고 그럴 때면 홀린 듯 신발을 거꾸로 신고 어둠 속으로 자진해 걸어갔다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 다급하게 밤을 울리고
아무도 부르지 않는 오늘의 밤은 나를 울리고
나를 부르는 소리 기어이 찾고야 말겠다며 나는
날 감아쥔 어둠을 얼르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거리의 행인들은 여전히 어디서 본 듯한 연기를 해댔고
아직 그치지 않은 비의 흔적이 나트륨 불빛 아래에서 하늘거리던 순간
따뜻하고 축축한 냄새가 다시금 나의 이름을 불렀다 또렷한 발음으로
돌아보면 사라지고 말 것들 그것을 알기에 나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돌아보지 않을 용기를 취하기 위해
하지만 힘껏 들이마신 숨이 너무 아파 이내 숨을 내뱉었고

주체할 수 없는 충동에 돌아본 그 자리에는

그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마악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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