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아이튠즈를 살펴보다가 소설가 김영하가 팟캐스트에서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이라는 일종의 라디오 방송을 운영하고 있다는 걸 알게된 후였다. 그 방송은 문학작품의 낭독과 그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소설가가 손이 아니라 입으로 말하기로 결심한 것일까?
몇몇 사람들이 낭독 문화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의 어떤 작가들은 낭독을 통해 비로소 문학이 완성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보았을 때 낭독은 시를 읽는 것, 즉 운율을 가진 어떤 문장을 읽을 때에만 의미가 있는 행위였다. 독서가 책을 '눈으로' 읽는 사람이 기준인 행위이며 글을 통해 '자신과' 대화하는 행위라면, 낭독은 책을 '입으로' 말하는 사람이 기준인 행위이며 말을 통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행위였다. 이것은 책에 담긴 내용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책을 읽는 행위는 그 자신이 주체가 되어 호흡을 스스로 조절하여 읽을 수 있는 반면, 책을 듣는 행위는 듣는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스스로 그 호흡을 조절할 수 없는 까닭이다. 따라서 시와 같이 운율이 존재하고 뜻이 함축적인 작품은 낭독이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소설 같은 작품은 낭독이 그다지 의미를 가질 수 없으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지만 김영하는 (독자가) 글을 읽게하는 대신 (청취자가) 그 내용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로 결심했다.
오랜 세월 동안 글을 써왔기에 가끔은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낭독을 통해 지금까지는 몰랐던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최신기술을 좋아하는 그이기에 팟캐스트라는 새로운 방식을 단순히 이용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중세 문학살롱의 문화를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낭독으로 문학작품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사실 발성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청취자의 문학 이해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청취자의 흥미를 위해 하는 것이며, 그의 가장 큰 목표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과 작가 사이의 새로운 소통방식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이상함을 난 받아들여야한다. 작품의 이해방식과 상관없이 그는 말할 권리가 있고---이 팟캐스트의 이름은 청취자의 '책듣는' 시간이 아니라 김영하의 '책읽는' 시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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