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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보스코 <아이와 강>, 주석을 달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20. 1. 14.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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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단조로운 풍경은 내 마음을 쓸쓸하게 했다."


ㅡ 이 구절에 곧바로 같은 작가가 지은 <이아생트>를 떠올리게 되었다. <아이와 강>의 주인공은 어린이고 <이아생트>의 주인공은 성인이라 서로 다르지만, 작품의 분위기나 배경은 꽤 닮았다. <이아생트>의 주인공은 "사방에 인가라고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아이와 강>의 어린이는 집 주위에 "외로이 떨어져 있는 두셋의 농가들뿐"이라고 토로한다. 차이점이라면 <이아생트>의 어른 주인공은 <아이와 강>의 어린이와는 다르게 그 풍경에 마음이 끌리었다는 것이다. <이아생트>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그 집은 외진 것이 내 마음을 끌었다." 그리고 그 표현은 내 마음을 끌었다. 



2.

"우리는 배 안에서 부싯돌 한 개를 찾아냈다. 그러나 우리에겐 부싯깃이 없었다. 가쪼는 죽은 나무 조각의 단단한 공이를 비틀어서 참을성 있게 문지른 끝에 마침내는 불티를 하나 얻어 냈다. (...) 우리는 그 불을 재로 단단히 덮어서 꺼지지 않도록 한 뒤에 구멍을 파서 숨겨 놓았고 불은 천천히 타기 시작했다. 그러자 불은 눈에는 안 보였지만 진흙 속에 묻힌 불씨가 되어 저녁까지 살았고, 우리는 다시 음식을 익힐 수가 있었다."


ㅡ 위 장면은 불씨 관리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 시대 말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만 해도 불을 피우려면 부싯돌을 써야 했다. 중국에서 성냥개비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불을 피우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번 피운 불의 불씨를 관리하는 게 무척 중요했다. 불씨를 꺼트리는 건 큰 실수여서 불씨 관리를 담당했던 옛 시대의 며느리들은 불씨 관리에 힘써야 했다.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지금도 <불씨 꺼트린 며느리> <불씨 지킨 새색시> 같은 동화책이 나오고 있다. 


위 묘사에서 알 수 있듯이 불씨를 오래도록 살리려면 재로 덮어두어야 한다. 이를 두고 소설가 최명희는 <혼불>에서 죽은 재가 산 불씨를 살린다고 했다. 불씨를 재로 단단히 덮어두자 불은 진흙 속에 묻힌 불씨가 되어 천천히 타기 시작한다. 그런데 가스레인지가 사라져 가는 요즘, 현대의 아이들은 놀이터의 사라진 모래처럼 불을 접하기도 쉽지 않게 되었다. 이제 아이들에게 불의 주된 기억은 생일 케이크에 꽂는 양초 끝에서 타오른다.



3.

바르가보는 그의 주머니에서 기다란 칼을 하나 꺼냈다. 그는 빵 조각을 커다랗게 잘라내고 그 위에 물고기 두 마리를 올려놓은 다음 칼날로 그 위에 십자가를 그었다. 그러고는 먹었다. 


ㅡ 바르가보는 음식에 사용하는 개인용 칼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유럽인들은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각자 주머니에 개인용 칼을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18세기 즈음에 영국의 식사용 나이프가 끝이 뭉툭하게 변하더니 몸에 소지하는 것도 금기가 되었다. 이런 금기는 섬이었던 영국에서 먼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음식 저널리스트인 비 윌슨은 <포크를 생각하다>에 이와 관련한 작가 주세페 바레티의 일화를 소개했다.


"1769년 런던에서 이탈리아의 문필가 주세페 바레티는 공격자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던 중 소형 접이식 과도로 상대를 찔러 기소되었다. 법정에서 바레티는 사과, 배, 사탕과자를 자를 용도로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 대륙에서는 통상적인 일이라고 변론했다."[각주:1]


비 윌슨은 그 변론을 통해 이미 칼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6세기와 17세기까지만 해도 식사용 나이프와 부엌용 칼은 그저 크기만 다를 뿐 날카로운 건 똑같았다. 


<아이와 강>의 시대 배경은 앙리 보스코가 살았던 20세기 초 프랑스 남부로 보이니, 비르가보가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는 모습은 시골 아이에게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주머니의 칼은 문명에서 그만큼 떨어져 있음을 나타내는 암시다. 칼은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4.

"그날 가쪼는 바다병어 네 마리와 미꾸라지 한 마리를 잡았다.

나는 피라미 한 마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우리는 신바람 나는 생활을 했다. 우리는 우리 양식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ㅡ 이 소설에서 두 아이는 생각 외로 손쉽게 음식과 물을 구한다. 이미 그런 생활에 익숙한 것으로 나오는 가쪼라는 이름의 아이는 유랑하는 삶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며 낚시와 활, 채집으로 쉽게 먹을 것을 구한다. 


어쩌면 그런 장면에서 동화의 허구를 생각하게 될 수도 있겠다. 역시 아이들이 읽는 책이구나 하고 여길 수도 있겠다. 아이들의 생활상은 농업 혁명 이전의 수렵-채집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수렵-채집인들이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렇게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는 수렵-채집인들의 삶이 현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가혹하지 않았다고 보고한다. 오늘날의 연구는 채집인들의 삶은 풍족했으며 오히려 농경을 시작하면서 비참해졌다는 견해를 내놓는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저서 <총, 균, 쇠>에서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업 사회로의 전환은 오히려 농경민의 삶을 후퇴시켰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과학자들은 수렵 채집민의 생활을 설명할 때 흔히 '고달프고 야만스럽고 짧은 삶'이라는 토머스 홉스의 구절을 인용한다. (...)

그러나 오늘날 식량 생산이 (...) 곧 육체 노동 감소, 안락 증대, 굶주림으로부터의 자유, 평균 수명 증가 등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는 직접 먹거리를 기르지 않으면서도 풍요롭게 살고 있는 제1세계의 사람들뿐이다. 전 세계에서 실제 식량 생산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농경민이나 목축민들은 수렵 채집민들보다 잘 산다고 말하기 어렵다. (...) 하루 중 노동 시간이 수렵 채집민들보다 오히려 길면 길었지 짧지는 않다."[각주:2]


중국의 사회학자 정예푸는 <문명은 부산물이다>에서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 더 나아가 초기 농민의 삶에서 산업혁명 초기 노동자 계급의 상황을 떠올렸다.


"위대한 문명의 첫 출발에 역행하는 듯한 사실도 있다. 바로 개개인의 삶이 더욱 고생스러워졌다는 점이다. (...) 채집-수렵민들의 평균 노동시간을 보면 오늘날 농민의 평균 노동시간이 그들에 비해 훨씬 길다는 사실을 확실히 할 수 있다. (...) 식량 생산의 전문화는 인류 음식의 다양성을 심각할 정도로 훼손했다. 이런 현상은 음식물 유적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Haim Ofek, 2001, p.239) 이런 격차를 인류 문명사에서 하나 더 볼 수 있는데, 산업혁명 초기 노동자 계급의 상황이다."[각주:3]


그러니 이미 가쪼라는 아이가 수렵 생활에 익숙하고 주위에 동식물이 풍부하다면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을 수 있다. 사람도 단 두 명뿐이니 많은 음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주인공 파스칼레가 어른들과 떨어져 자연에서 생활했던 그 시기를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로 여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5. 

"나는 그때까지 밤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밤이 오는 것에 몹시 놀랐다. 아니, 적어도 커다란 나무 모습을 이루는 별들과 함께 동쪽에 어둡고 파랗게 오는 그런 밤은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밤의 그 아득한 모습을 보자 나는 겁에 질렸다."


ㅡ 은하수를 묘사하고 있다. 달이 뜨지 않은 밤이었을 것이다.



6.

"불룩하게 진흙이 쌓인 곳을 헤치고 구덩이를 팠다. 물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우리는 계속 땅을 파서 조그만 웅덩이를 만들었다. 진흙 속의 어떤 틈으로 물이 새어 나와 모래층을 적셨다. 우리는 벽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곳에 갈대 하나 꽂아 놓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처음에는 갈대가 바싹 마른 채 그대로 있었다. (...)

마침내 물방울이 하나 엉겨붙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이나 아무 변화가 없었다. 드디어 물방울이 떨어졌다. 다른 물방울이 또 하나 푸른 갈대 끝으로 천천히 흘렀고 샘이 만들어졌다. 가느다란 줄기의 보잘것없는 물이었지만 걸러진 것이었다."


ㅡ 진흙이 엉겨 있는 흙바닥에서 식수를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 묘사하고 있다. 축축하게 젖은 흙이 있는 곳에서 용천수가 있음을 짐작하고는 그곳의 땅을 판 뒤 한쪽에 벽을 쌓아 물이 고일 수 있게 한 뒤에 내부가 비어 있는 갈대를 이용해 모래를 걸러내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7.

"그 이야기는 우리들 마음을 몹시 흔들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여자아이 자신도 가슴이 북받쳤다. 마침내 그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가쪼는 감동되어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뭐니?"

그 아이가 대답했다.

"이아생트."

그러고는 계속하여 울었다."


ㅡ 난 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렇다, <이아생트>와 이렇게 연결되고 있었다.




  1. 비 윌슨 <포크를 생각하다> 김명남 옮김 (까치 2014) 96~97쪽 [본문으로]
  2.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2013), 160쪽 [본문으로]
  3. 정예푸 <문명은 부산물이다> 오한나 옮김 (378, 2018), 11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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