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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로봇 청소기, 그리고 어떤 문제아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7. 3. 23.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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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끔씩 잡지책 '전원 속의 내 집'에 게재되어 있는 단독주택 중 한 곳이 인터넷에 소개되어 올라오곤 한다. 집의 형태도 그렇지만 내부 구조 또한 평범하지 않은 그런 집들은 대개 부러움과 질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질시의 댓글들이 쉽게 달리는데, 대개 '창문이 많아서 보기는 좋지만 단열이 나빠 냉난방비가 많이 들 것이다', 그리고 '청소가 쉽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하나의 질투 어린 시선이 들어간다. "사진 찍는다고 살림을 다 치워놨네. 누가 평소에 저렇게 해놓고 살아." 


집이 의리의리하지는 않지만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다. 아마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청소를 매일 한다. 식사를 하면 곧바로 설거지를 하고 되도록이면 냄비와 그릇도 물기가 사라지면 바로 찬장에 넣는다. 한 번 쓰려고 꺼내 놓은 물건은 다 쓰고 나면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누군가 우리집에 온다면 자기들 때문에 일부러 청소를 해놓았구나 하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난 원래 그렇게 해놓고 산다. 그런 생활이 습관화된지는 꽤 오래 되었다. 


사실 정리정돈된 상태라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어떤 이에겐 정리되어 있는 상태가 어떤 이에게는 무질서해 보일 수 있고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있는 정리 패턴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 하고 원하는 자가 상황을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 왔으니, 내가 원하는 정리정돈된 상태라는 것도 내가 만드는 것이지 다른 이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런 내 의도와는 다르게 내 바람이 상대에게 강요의 형태를 띠었을 때도 적지 않았던 듯하다. 어쨌거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내가 바랐던 건 온전히 내가 감당하려고 애썼다. 그런 '믿음' 때문에 청소라는 노동이 그리 싫지는 않았다.



2.

내가 어떤 '정리된' 상태를 좋아하기는 한다. 하지만 바닥 청소를 매일하며 살지는 않았었다. 먼지가 하루만에 닦아내야 할 정도로 쌓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랬던 게 고양이 루미를 키우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루미가 아주 어렸을 때는 털이 그리 빠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성년이 되자 털이 놀랍도록 많이 빠지기 시작했다. 물기 묻은 손으로 털을 한 번 쓸어내리기만 해도 손에 털이 가득했다. 털가죽 제품이 그런 상태였다면 당장 환불을 요구했을 것이다.


루미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난 매일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루미는 위쪽으로 올라가는 걸 좋아했으므로 바닥뿐만 아니라 가구들도 닦아야 했다. 바닥을 청소기로 밀고 가구를 닦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30분 정도로, 시간만 생각하면 그리 큰 노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의 상대성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30분은 한없이 짧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몸이 피곤하거나 뭔가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무척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하루, 한 달, 일 년이 지나고 삼 년이 넘도록 매일 쓸고 닦고를 반복하는 동안,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일에 종종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다이슨 청소기를 두고 오래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봇 청소기를 구매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매일 청소를 하는 나에게, 로봇 청소기가 나를 대신해서 청소를 해주는 10분에서 20분 남짓한 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로봇 청소기는 완벽하지 않아서 어느 구석에 처박힐 때도 있었고 청소를 하다 말고 충전기로 돌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에겐 너무나 편리한 존재였다. 세탁기가 주부의 삶의 질을 끌어 올렸듯이 난 로봇청소기 역시 대다수 사람들의 삶의 질을 끌어 올릴 거라 믿는다. 덕분에 청소는 피할 수 없기에 즐겨야 하는, 그렇게 즐길 수 있는 일이 되어 갔다.


그러나 때로는 애초에 루미가 집에 없었으면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루미가 높이 뛰어 오르며 창문의 실리콘을 긁어 놓을 때, 원목 가구에 발톱 자국을 남길 때, 젖은 몸을 한 채 화장실로 뛰어들어 주변을 모래 더미로 만들어 놓을 때, 마구 뛰어다니며 방금 청소했던 곳에 털뭉치를 떨어트려 놓을 때, 그런 과오들이 한순간 떠오르며 내가 괜한 일을 벌였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 나에게 루미란 그저 문제적 존재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일종의 문제아였다.



3.

현관문을 잠깐 열어 놓은 사이, 루미가 밖으로 나와 바닥에 몸을 비볐다. 몸을 비비다 나를 발견한 루미는 벌떡 일어나 자신의 아지트로 부리나케 도망쳤다. 뛰어가며 적지 않은 털을 떨군 건 당연한 처사였다. 나는 '역시 루미는 문제아야'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루미의 호기심이, 바닥을 비비고자 하는 본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현관문을 안일하게 열어두지 않았으면 될 일이었다. 루미가 뛰어다니는 걸 잘못되었다고도 할 수 없었다. 루미에게 실내에서는 얌전히 걸어다니라고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걸 감수해야 하는 것은 이 일의 발단을 마련한 나의 몫이었는데도 난 그저 루미를 문제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은 루미를 문제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내가 문제아였다.


인생을 편하게 사는 건 간단했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되었다.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자는 방관자나 편승자라고 불리지만 책임에서는 자유롭다. 루미를 키우지 않았다면, 키우더라도 집안에 털이 굴러다니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면, "누가 평소에 저렇게 치워 놓고 살아"라는 기준에 만족하며 살았다면 난 당장의 문제에서 자유로웠을 것이다. 나는 내가 시도해 놓고 그에 수반하는 책임에 힘겨워하였으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원인을 내가 아닌 다른 것에서 찾으려 했다. 그것은 내가 상대방에게 공동의 책임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어디나에 방관자가 있고 그에 상반되는 희생자가 있는 듯하다. "나는 무얼 위해 그 정도로 신경 썼지. 하지만 그 사람은 방관만 하면서 나 몰라라 해." 가정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그런 생각이 만연해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방관자나 희생자라는 개념은 아주 좁은 분야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어느 곳에서 열심인 사람도 다른 곳에선 방관자인 경우가 많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니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 자신도 어느 공동체에서는 방관자이자 편승자일 확률이 높을 테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방관자나 편승자에 불과할 가능성이 무척 높을 테니.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방관자나 편승자라고 생각하는 데 익숙지 않다. 우리는 자신이 도움을 주는 부분은 잘 알아도 도움을 받는 부분은 잘 모른다. 


앞서 인생을 편하게 살기 위해선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삶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크게 두 갈래의 길이 있는 듯하다. 무언가를 시도하면서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라 여기거나, 무언가를 시도하면서 스스로를 적절한 방관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하얀 털의 생명체가 오늘도 턱을 괸 채 누워 있다. 저 느긋한 모습을 보면, 어쩌면 한 사람의 문제아가 오늘만큼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배워갈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얼마 전 네 살이 된 루미. 2017.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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