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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밝은 방> 살아 있는 사진의 신화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8. 18. 18:04

본문

1.

사진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접근은 인문학적 방식을 띤다. 그가 만일 기술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면 먼저 카메라의 역사나 렌즈에 관한 운을 띄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므로 <밝은 방>의 시작은 다른 형태를 보인다. 그는 사람들이 사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살피며 논의를 시작한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사진들을 보여줘 보라. 그는 곧바로 자신의 사진들을 꺼내고 이런 식으로 말할 것이다. "여기 좀 보세요, 이게 내 형이고, 이게 어릴 적 나예요." 결국 사진은 '보세요' '봐' '여기 있다'가 교대되는 노래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떤 마주봄을 손가락으로 지시하지만, 이런 순수한 지시적 언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17쪽)


롤랑 바르트는 사람들이 사진을 보며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먼저 살핀 뒤, 이제 그 자신이 사진을 보며 어떻게 반응했었는지를 생각한다. 사진사가 나를 향해 카메라를 돌릴 때 나는 어떠한 감정에 빠지는가? 사람들이 내가 찍힌 사진을 볼 때 나는 어떤 존재가 되는가? 


롤랑 바르트의 이런 생각은 참 특이하게 비춰질 수 있다. 보통은 사진을 보면서 그런 식의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메라를 바라보는 우리의 표면적 반응은 롤랑 바르트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카메라 렌즈를 향해 억지로 미소짓고, 자신의 얼굴이 잘 나왔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또 사진에 나온 자신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궁금해 한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런 반응의 이유를 탐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진에 다양한 관심과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이 사진은 나를 잘 드러내고 있는가? 사람들이 이 사진을 좋아할 만한가?) 자신에게 깃들었던 그런 감정들의 원인에 대해 그다지 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사진을 찍고 카메라에 잡히며, 자신의 얼굴이 드러난 여러 사진들을 보면서 어떤 불편한 감정에 빠지지만 금세 그 기분을 잊는 것이다. 하지만 롤랑 바르트는 그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 든다. 실제로 들었던 어떤 감정과 그 원인을 천천히 서술하며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연다. 이것이 그의 방식이다.



2.

"카메라 렌즈 앞에서 동시에 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이고, 내가 사람들이 나라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자이며, 사진작가가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가 자신의 예술을 전시하기 위해 이용하는 자이다. 달리 말하면 이상한 행동이지만 나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모방하며,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누군가 내 사진을 찍도록 놓아둘 때마다) 진짜가 아니라는 느낌, 때로는 기만의 느낌이 반드시 나를 스쳐간다."(27쪽) 


롤랑 바르트 같은 저명한 철학자가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이가 저런 말을 했다면 그는 이상한 사람,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심하게는 조현병에 걸린 사람으로 취급될 것이다. 물론 그런 식의 시선 역시 평범한 이들의 것이다(평범한 사람들일수록 아주 쉽게 다른 이들을 이상한 사람 취급한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자신과 조우하며 이성적이고도 감성적 탐구를 계속하는 사람, 그리고 그런 글의 독자가 평범할리 없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의 사진 에세이를 중심으로 평범하지 않은 이들간의 은밀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밝은 방>의 위력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사진이 아닌 단지 '일부'의 사진에서만 자신이 매혹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찾기 시작한다. 그는 우선 단어를 찾는다. 사진이 자신을 이끄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한 낱말을. 그가 찾은 단어는 '모험'과 '생기 불어넣기'이다.


"어떤 사진들이 나에게 주는 매력을 (잠정적으로) 지칭하기 위한 가장 정확한 낱말은 모험이라고 생각되었다. (...) 이 음울한 사막에서 갑자기 어떤 사진이 나에게 다다른다. 그것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그것을 존재케 하는 그 매력을 이런 식으로, 즉 생기 불어넣기로 명명해야 한다. 사진 자체는 전혀 생기 있는 게 아니지만(나는 '살아 있는' 사진들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것이 모든 모험이 수행하는 것이다."(34~35쪽)



3.

<밝은 방>을 읽은 독자들은 대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용어 설명에 중점을 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용어들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 무척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 용어의 정의를 안다고 해서 롤랑 바르트가 길게 서술하고 있는 사진에 관한 구조적, 현상학적 문제들이 이해되거나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심지어 그는 이 용어들을 생각보다 자주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는 롤랑 바르트가 어떤 '차이'를 주목하는 것에서 자신의 고찰을 시작했다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어떤 작가의 모든 사진이 자신에게 유의미하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진엔 무관심하며, 어떤 사진을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이미지화'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매혹을 느끼는 사진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심지어 너무나 형편없어 보이는 사진에서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진은 '모험'이 될 수 있으며, '생기 불어넣기'가 될 수 있었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이 고백을 무척 놀랍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작가, 특히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낸 뒤, 그것을 작가와 (그것을 알아본) 독자가 지닌 특별한 능력의 결과물로 취급하는 현상이 과거부터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명한 작가의 어떤 작품을 보면서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관람객에게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그 관람객의 예술적 감수성을 의심하고 비웃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그런 경향을 자기 스스로에게도 강요해왔다. 건전한 비판을 두려워하는 데다가 오히려 그것을 건전치 못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회를 겪고 있다 보니 롤랑 바르트의 그런 '고백'이 무척 놀랍게 다가왔다. 


"스티글리츠의 사진들 가운데 나를 매혹시키는 작품은 가장 유명한 것뿐이다."(33쪽) 


우리는 그 사진이 진정한 무엇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유명한 작가가 찍은 사진이기 때문에 애써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점차 거기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 믿고 그 안에서 단서를 찾아내고자 하는 탐정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런 행위는 궤변적이다. 처음에 사진작가는 어떤 대상이 '주목할 만하기 때문에' 촬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진으로 찍혔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그리하여 '아무것이나' 가치의 궤변적인 절대치가 된다"(51쪽)고 말한다. 이렇게 롤랑 바르트와 같은 유명한 철학자이자 비평가도 일부의 작품에서만 매혹을 느꼈다는 것에서 대중들이 일종의 위안, (어쩌면) 부끄러움을 얻어갈 수 있을까? 


이제 그는 자신이 어째서 특정한 사진에만 흥미를 느끼게 되었는지를 현상학과 관련하여 파악해보고자 한다. 내(롤랑 바르트) 의식 속의 어떤 것이 그런 사진을 지향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것을 포착할 수 있는가? 롤랑 바르트는 자신이 '감정'을 통해서만 사진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밝힌다. 그리하여 "하나의 문제(테마)가 아니라 상처로서 사진을 심층적으로 탐구"(36쪽)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보고, 느끼며, 따라서 식별하고 쳐다보며 생각하기 때문이다."(36쪽)


그 과정에서 '스투디움'과 '푼크툼'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그는 어떤 사진을 보면서 특정한 감정(감동), 전념, 애정을 느끼게 되는데, 그 감정은 "도덕적, 정치적 교양의 합리적인 중계"(41쪽)를 거친다. 다시 말해, 그 사진을 볼 때 일종의 '길들이기'에 속하는 감정이 터져 나온다. 그런 사진에는 전쟁 사진, 아프고 가난한 자들을 찍은 사진, 어둡고 황량한 풍경 사진 등이 있다. 롤랑 바르트는 그 사진을 보면서 느끼는 인간적 관심을 라틴어인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진이 있다. 그 사진은 스투디움을 풍기는 사진과는 달리, 사진에서 장면이 튀어나와 화살처럼 자신을 관통하며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전쟁 사진이나 수난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볼 때 통상적으로 빠지게 되는 일반적인 정신 집중을 방해한다. 롤랑 바르트는 그 상처,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요소를 '푼크툼(punctum)'이라고 명명한다. 이렇게 그는 자신에게 유의미한 사진을 크게 두 가지 요소로 분리한다. 그리고 그 두 요소를 중심으로 사진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이 과정들 전부를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기로,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다소 어렵게 밝히려는 것 중 하나는 (그리고 내가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사진을 보며 느껴왔던 그 고귀해 '보이는' 그감정들이 실은 일종의 신화라는 사실이다. 과거, 남성은 쇼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여성은 식사를 준비하는 TV드라마에 우리는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었다. 당시에는 남녀의 역할에 관한 고정된 신화가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사람들의 실제 삶도 그러했다). 이제 그 신화는 (여전히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곤 하지만) 깨지고 있으며, 그 신화의 등장인물인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 곳곳에서 울리고 있다. 바로 그 옛 신화처럼, 롤랑 바르트는 사진에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고착화되어 있는 이미지, 어떤 신화가 찍혀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진에 내재화되어 있는 신화를 자신이 어머니의 사진을 보았을 때 느꼈던 최초의 감정을 통해 밝혀내려 하는 것이다.



4.

7년 전, 이 책을 읽고 나서 하나의 글을 썼을 때, 나는 롤랑 바르트의 글보다는 그의 글을 인용하여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데 치중했었다. 사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밝은 방>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또 스투디움이나 푼크툼과 같은 용어의 정의를 외우는 것은 나의 관심사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중요한 것은 개념을 그저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이용'하여 지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 자와 찍히는 자, 그리고 그 사진을 보는 자들 사이의 어떤 지점에 스투디움이 있다면, 나는 그것이 사진뿐만 아니라 사람의 관계에도 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의 관심은 그것이다. 성인이 된 현대의 우리들이 이제 친구를 만들지 못하고 사랑을 계산과 합리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면, 그것은 연인과 친구 관계에 거짓된 신화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관계는 우리를 결코 '찌르지' 않는다. 대부분의 관계들이 언제든지 끊겨도 아무 문제 없는 상태에서 지속되고 있으며, 심지어 이제 그 관계를 스스로 거부하며 홀로서기를 택한다. 이것은 전쟁 사진을 보고 슬픈 감정에 빠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 정도의 감정으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그 감정만으로도 우리는 괜찮은 상태라며 스스로 위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은 우리를 찌르지 않는다. 그래서 전시회를 나오는 순간 곧 잊고, 우리의 삶과 아무런 연관을 찾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슬픔을 위로 받고 기쁨을 칭찬 받으며 또한 위로하고 칭찬한다. 그래서 따뜻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신화다. 그리고 이 신화는 앞으로도 무척 오랫동안 '죽었다'고 선언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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