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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관계의 심리학 소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8. 2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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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같은 과학 이론과 프루스트와 제임스 조이스, 새뮤얼 존슨과 같은 문학가들의 일화가 갑자기 튀어나오곤 하는 이 소설은 전통적 형태의 순수 문학도 아니고 현대적 장르 소설도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인문학 글에 과학 이론과 공학적 지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풍자를 하곤 했는데(에코는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접목할 때 발생하는 어색함을 이용하여 자신의 유머를 드러내곤 했다), 알랭 드 보통은 무척 진지하게 그런 방식을 채용했다. 그런 기법은 잘못 사용하면 굉장히 서투르고 어색하게 보인다. 서양 코트를 걸친 채 동양식 모자인 갓을 쓴 것처럼 우스꽝스럽게 보일 확률이 높은 것이다. 그래서 몇몇 평론가들은 알랭 드 보통의 초기 소설을 가리켜 아직 덜 다듬어진 형태의 모습을 보인다고 평했다.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조한다. 그의 소설은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병주 작가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이병주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 소설을 썼다면,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랑론, 혹은 관계론을 주장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알렉산드리아>의 등장 인물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드러내기 위해 맥락 없이 너무나도 갑자기 가까워지는 것처럼,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의 등장 인물들 역시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목적에 다다르기 위해 관계가 급격하게 진전된다. 화자 또한 꽤나 설명조여서, <채식주의자>, <수도원의 비망록> 같은 본격 소설이 주는 문학적 재미와 흥분, 완성도를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알랭 드 보통의 이 소설은 '담장 너머에서 향기를 풍기는 미지의 꽃'을 상상하며 얻는 아름다움의 추구가 아니라 독자를 설득하고 이끌기 위한 전략적 도구의 위치로 떨어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문학 자체의 작품성이나 예술성은 그만큼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사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등장인물과 구성이 작가의 상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소설이라 부르고 있긴 하지만, 심리학자가 실제 부부를 예로 들어가며 각 부부의 심정을 풀이해 주는 사회학 서적과 내용이 닮아 있다. 소설의 그런 경향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짙어진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결함처럼 보이는 것을 다양한 아이디어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의 전기문을 작성하는 전기작가의 입장에서 애인을 바라본다거나(그래서 소설 속 대화는 대화라기보다는 기다란 자기서술에 가까울 때가 많고, 그런 부분 역시 소설의 관점에서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첫인상으로 타인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교훈을 자신이 다른 소설(제인 오스틴의 <엠마>)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첫 문장만으로 판단해버렸던 경험을 이용하여 아우르는 등, 다양한 수법을 사용하여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어리석은 허영이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 따위를 가감없이 찌르는 그의 날카로움 역시 독자들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판다곰 구조운동이나, 멸종위기에 처한 호주의 개미핥기 살리기 운동 같은 것에 참여"(49쪽)하는 사람들을 보고 훌륭하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이면에 있는 "후기 사춘기"적 허영을 지적하며 "나는 그런 타입의 여성을 잘 알고 있었다"(48쪽)라고 선언함으로써 비슷한 생각을 했던 독자들에게 쾌감을 선사해 주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엔 그런 식의 생각(어떤 부류의 인간들을 잘 알고 있다)을 하는 자는 사실 심각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고 하여, 이전에 했던 자신의 주장을 곧바로 뒤집어 버리기도 한다. 그는 이런 방식을 이용해, 작가와의 어두운 공모를 은밀하게 기뻐하고 있던 독자에게 '자기 돌아보기'의 거대한 충격(혹신 배신)을 선사한다.

이렇게 알랭 드 보통은 감성보다는 (다소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같은) 반전이 주는 충격과 지적 교양을 동시에 추구하며, 따라서 그의 이런 기법을 뛰어난 실력으로 평가하는 독자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될 것이다. 심리학 서적을 좋아하는 독자들, 그러니까 엄마가 자신에게 왜 옷을 세련되게 입으라며 닦달하는지, 저 남자애는 왜 매사에 불만이 많은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사소한 트집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인지, 부모의 나쁜 행동을 자녀가 어떻게 닮아가는지, 언니와 남동생 사이에 끼어 있는 여자애는 어떻게 '샌드위치 증후군'에 빠지게 되는지를 궁금해 했던 독자는 바로 그런 호기심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 소설책을 호평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술성을 띤 문학 작품이 아니라 소설의 기법을 차용한 심리학 서적이자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보다는 훨씬 기교적이며 소설적인 관계의 철학서(일종의 행복 찾기)를 본다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알랭 드 보통에게서 기대했던 보람과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조차도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고개를 조금 갸우뚱하게 되기는 하겠지만, 적어도 (행복에 이르는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에게 항상 신경질을 부려댔던 다 큰 자식의 부끄러운 위안을 얻어갈 수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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