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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 <페소아와 페소아들> 당신의 분위기를, 나는 연기처럼.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8. 19.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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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 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몇 가지 용지와 바에서 받아온 커피를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서두르고 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푸른색의 얇은 블라우스를 회색 스커트 안에 넣어 입은 그녀는 회사에서 곧장 퇴근한 듯한 사무적인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를 당겨 앉은 뒤 재빨리 용지들을 넘겼다. 종이가 급하게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흰색 A4용지에 아주 작게 인쇄되어 있는 글씨는 바로 앞에서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녀는 안경을 잠깐 고쳐쓰더니 곧바로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양쪽 귀에 꽂았다(난 그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은 귀에 '꽂는다'라기보다는 귀를 '막는다'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했다). 그리곤 그것이 일종의 신호가 되기라도 하는 듯, 네 가지 색이 들어 있는 볼펜을 꺼내 재빠르게 심지를 넣고 빼기를 네 번 반복했다. 딸깍딸깍딸깍딸깍. 볼펜 심지가  딸깍거리는 소리가 볼펜의 색을 바꿀 때마다 들려왔다. 손은 좀처럼 쉬지를 못했다. 무언가에 밑줄을 긋고, 무언가를 쓰고, 또 한편으로는 휴대전화를 보며 작은 수첩에 무언가를 메모했다. 때때로 그녀는 두 손으로 커피잔을 붙잡고는 아메리카노로 보이는 것을 빨대로 빨아당겼다. 그리고 바로 그때 시선을 잠깐 창밖으로 던졌다. 그녀가 고개를 드는 것은 그때뿐이었다. 조금 얇은 입술은 투명한 립글로스가 발려 반짝거렸으나 닫혀 있는 상태였고, 그래서 입의 표정에는 미소가 없었다. 그녀가 주변의 것들을 모조리 거부하고 있다는 건 명백했다. 모든 게 나와 달랐고, 그래서 그녀가 존재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멈춘 채 곧잘 창밖을 길게 응시하기도 했다. 펼쳐 놓은 A4용지에 관심을 끊은 채 한동한 휴대전화를 바라보기도 했다. 복장은 방어적이었지만 둥그스럼한 검은 안경과 층을 낸 긴 앞머리에 살짝 가린 하얀 이마에는 개방성이 엿보였다. 꽃장식이 달려 있던 굽이 낮은 검은색 에나멜 구두에 대해선 나쁘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소박한 그녀에겐 그게 최선이었을 테니까. 분명한 건 내가 말을 걸었더라면 그녀의 표정에 미소가 보였을 거라는 점이다. 종이를 아끼느라 글씨를 작게 인쇄한 탓에 글을 읽을 때마다 긴장해야만 했던 그녀의 눈은 나로 인해 커다랗게 변할 것이 분명했다. 글자와 눈동자 모두 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그녀는 일어서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특이한 인상을 남기고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모든 게 나와 달랐고, 이젠 그래서 내가 존재하는 듯했다.



2.

이게 무엇이냐고? 이것이 바로 <페소아와 페소아들>을 읽은 나의 감상이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의 산문을 읽다 문득 든 주체하기 힘든 감정을 해소한 결과물이다. 이걸 다 쓰고 나서야 견디기 어렵던 내 마음의 불안이 사라지기 시작했으니 이 글은 <페소아와 페소아들>의 감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결과물과 <페소아와 페소아들> 사이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페소아와 페소아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더러, 이 산문집을 알고 있는 사람이더라 하더라도 굳이 내가 쓴 감상과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나를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당신의 사유는 정당하다). 이해할 수 없었던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들이 그의 낡은 서랍 안에서 그의 사후에야 발견되었다. 그리고 그의 책을 지금 내가 본다. 이해라는 부질없고도 부정당한 일상적 경험에 둘러싸인 채, 실제로는 처음인 나의 사유를 찾기 위해 나는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린다. 글이 완성될수록 페르난두 페소아가 일으킨 불안이 사라져감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불안의 시작. 아, 이것야말로 당신이 내게 제공해 준 경탄할 만한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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