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2)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8. 14. 01:49

본문

운명을 결정하는 팔레노프시스는 있다. 소설가 김연수는 <사랑이라니, 선영아>의 소설 속 화자를 통해 그런 건 없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그런 결정은 인간적이지 않다. 질투가 그렇게 쉽게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아주 쉽게 발생하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과 의미가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이 팔레노프시의 꺾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우리는 무척 쉽게 행복에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럴리가 있는가? 남편이 지나가던 한 여자를 물끄러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의혹이 발생한다. 그것이 결국 자신의 못난 질투심 때문이라고 자책하지는 말자. 김연수가 그렇게 선언했다면 우리 인간을 아주 강인한 자로 상정하는 셈이다. 그러나 김연수는 사실 그런 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전 남자친구를 의심하는) 광수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광수의 아내가 진우에게 거의 몸을 허락할 뻔하는 장면을 굳이 소설에 써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가 독자의 성적 흥미를 자극하려는 상업적 의도로 그런 장면을 넣었다고 추측하고 싶지는 않다. 난 순진한 독자인가?)


우리는 결국 위로받아야 하는 존재다. 무엇으로부터? 그런 쉬운 의혹과 연약한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당신의 마음은 남편이 낯선 여자에게 보이는 헤픈 웃음에서, 아내가 직장 동료에게 보이는 마음 씀씀이에서 갑작스럽게 엿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팔레노프시스의 단순한 꺾임에서 불행한 기운을 엿보고, 다른 우연한 사건들마저 모두 연관된 것으로 상상하고 만다. 그 전에 아무런 전조가 없었다면 부케가 아니라 드레스에 문제가 생겼다 하더라도 잊고 넘어갔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에게서 강함이 아니라 연약함을 예견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상대가 강인하길 원하고, 그래서 상대의 의혹을 보듬기보다는,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은 의혹을 상대의 약점으로 규정하곤 눈앞에서 치워버리길 요구한다. 그리하여 팔레노프시스가 하나 더 꺾인다. 관계가 정해진 수순으로 치닫는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