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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등불에 대한 찬가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8. 14. 01:50

본문

1.

독자 저마다에게 특별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라면 앙리 보스코의 소설 <이아생트>는 그 목적을 온전히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 대부분이 이 소설의 맥락을 찾지 못한 채 헤매다 그 와중에 어떤 (혼돈의) 인상을 받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의문 부호로만 가득 차있을 뿐이라면 그것은 예술로도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아생트>는 의아스럽기 그지 없지만, 그 안엔 단순히 허무맹랑함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2.

이아생트라는 단어는 책의 1/3쯤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화자의 독백이 끝없이 이어지는 이 소설은 대체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명백히 하나의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등불에 대한 예찬이다. 소설의 첫 페이지부터 줄기차게 등장하는 이 등불의 존재는 소설 내내 주인공을 사로잡으며 따라다닌다. 그것은 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경건하게 느껴질 정도로 놀라운, 자연과 그 주변 사물에 대한 화자의 묘사를 따라내려가다 보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빛에 눈을 뜨고 있는 화자를 상상 중인 나를 발견하게 된다. 도대체 나는 왜 "꿈의 비일관성과 몽상의 첫 매혹들 사이에서"(62쪽) 헤매다 간신히 눈을 뜨고 있는 화자에 관한 이 대단한 (동시에 장황한) 묘사를 읽고 있는 걸까? 그때 등불이 다시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길을 헤매려 할 무렵 독자는 다시 등불로 돌아가 소설의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실타래를 쥐고 있음에 안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이 미로엔 입구는 물론 출구 역시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에 던져진 주인공처럼 독자는 갑자기 미로 속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져 있다. 독자는 이 소설에서 전통적인 소설의 전개방식을 따라 움직이며 어떤 결말(권선징악, 행복, 범인의 발견 등)에 다다르는 게 아니라 미로에 빠져 있는 그 느낌에 사로잡힐 뿐이다. 이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감정이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당신이 삶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것처럼 화자와 독자는 이 소설 속에 던져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꼭 어떤 목표를 발견하거나 특정한 감정의 해후를 위해 여행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이 소설을 읽어야 한다. 즉 일반적인 소설이 시작에서 과정을 거쳐 결말에 이르는 도정을 표현하려 한다면, 이 소설은 '과정에 머무르는 과정'을 묘사하려 한다. 그 과정에는 목표 없는 삶, 기약 없는 사랑, 반복되는 생활과 같은 불행이 있으며 그 반대편에는 혼자라는 평안, 옛 사랑에 대한 기대, 동물과의 교감과 같은 행복이 있다. 그 사이에서 어떤 것을 찾아낼지는 오로지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3.

그저 독자에게 달려 있다고 한다면 너무 무책임할까? 그럼 더 나아가보자.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단서가 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등불이다. 이 등불은 우리가 인생에서 결코 열어볼 수 없으며, 또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무엇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목적을, 그러니까 탄생의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그 알 수 없는 여정 속에서도 살아가야 할 이유처럼 보이는 흔적들을 목격하곤 한다. 바로 저것인가? 내가 살아왔고 또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하지만 실질적으로 다가서지 못하며, 용기를 내 다가가려 해도 결코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그럼 무시해버릴까? 하지만 막상 나를 위로해주던 그 등불이 보이지 않으면 놀라 당황하게 된다. 등불이 꺼져버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어떤 방향에서는 "농가의 불 켜진 정면이 안 보이는"(121쪽)건지, 불안에 떨며 자신을 진정시키려 한다. <이아생트>는 던져진 우리들의 독백록인 셈이다.



4. 

단서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잊은 채 살던 어린 시절의 은신처에 대한 기억이다. 바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젊고 혈기왕성한 당신이 아닌, 좋은 시절을 보내버린 당신은 이제 젊을 때 잊고 지내던 어린 시절의 비밀 장소를 불현듯 떠올리게 된다. 그곳은 집에서 숨바꼭질 할 때 가족에게 들킬까 조바심을 내며 숨어 있던 옷장일 수도 있고, 동화책 속에서 등장할 것 같은 비밀의 화원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건 간에 누구나 어린 시절의 은신처를 품고 있으니 <이아생트>는 바로 그곳을 건드리고자 한다. 당신이 잊고 있던 그 은신처를 떠올리도록 부추긴다. "나에게는 내 기억이라는 은신처밖에 없었다."(111쪽), "나는 거기에서 피난처를 발견했었다. 어린 시절은 은밀한 장소들에 대한 관심과 기호를 감추고 있다."(114쪽) 당신이 그 은신처를 살피는 동안 당신의 마음 속에선 무언가가 되살아 날 것이다. 그것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일 수도 있고, 앞으로 태어날 자녀에게 당신이 제공하고 싶은 은신처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건 그것은 사랑을 동반한다. 사랑, 어쩌면 바로 그것이 당신이 그저 켜져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채 다가가지 못했던 바로 그 등불은 아니었는가? 추억이란 어느 정도 상상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를 아름다운 것으로 조장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존재하지 않았던 비밀의 장소를 만드는 것에서 위안을 느낄 수 있다면 비록 허구일지라도 용서 받을 수 있으리라. 우리는 "비록 허구적인 것일지라도 비밀 장소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114쪽). 독자는 이 허구를 <이아생트> 그 자체라 간주할 수 있다. 우리는 허구를 통해 과거의 허구를 재생산하며, 그런 과정에서 마음의 위로를 얻어 내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아련하고 연약해 보이던 그 과거의 등불은 이제 동떨어진 사물이 아니라 그 자신과 동일시 된다. "때로 영혼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응시하는 것이 된다"(136쪽) 그렇게 등불과 하나가 된 뒤에야 비로소 그는 "처음으로 (...) 맑은 마음이 되었다."(137쪽) 그러나 이런 등불마저도 소설 속 여주인공인 '이아생트'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등불이 제공해 주던 힘은 이아생트라는 거대한 빛 아래에선 보잘것없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빛은 행복을 주는 동시에 비극을 드리우니, 그 햇빛이 사라지고 나면 등불은 너무나도 초라하게 보이는 것이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얼마나 쉽게 깨지곤 하는가!) 그리하여 소설 속 화자는 라 주네스트가 어둡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생각한다. "등불이 없었다. 왠지 나는 그것이 기뻤다."(145쪽) 주인공의 이런 태도는, 원하는 것을 향해 온전히 자신을 던지지 못한 채 도피할 구석을 마련해 놓곤 하는 우리의 우유부단한 전략을 드러내는 듯하다.



5.

<이아생트>의 주된 배경은 주변의 인적이라고는 집 한 채뿐인 거대한 벌판이다. 이렇게 외딸고 음험한 고장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속세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흔히 자연을 좋아하는 도인처럼 묘사되곤 하지만, <이아생트>의 등장인물들은 경우가 다르다. 그들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연과도 격리되어 있다. 그들은 자연과의 교류도 거부한다. 그들은 문을 닫고 집안의 등불이 비추는 나약한 빛마저도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덧문을 닫는다. 우리를 위압하고 억누르는 거센 비바람과 천둥, 높고 거대한 하늘의 기운에 우리가 몸을 바짝 엎드리듯이, 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런 위태와 불안을 느끼고는 도망친 셈이다. 우리가 자연에게서 도망칠 순 없겠지만, 사람과의 교류로부터는 도망칠 수는 있을 것 같아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사소한 말과 태도가 상대방에게 주었을지 모를 상처, 그리고 상처받은 이들이 가할 복수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들은 등불이 필요하지만 오직 하나의 등불만을 켤 수 있다. 너무 환한 빛은 두렵기 때문이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망치지만 아주 소수의, 한두 사람과의 교류는 허락한다. 두려워지면 언제든지 불어끌 수 있는 하나의 등불처럼, 그들은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인간의 잠재적인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유지한다.


그런데 그들은 왜 그렇게 관계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걸까? 천성적으로 그렇게 모두에게서 벗어나도록 태어났다는 무의미한 가정을 제외하면 하나의 답을 유추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서 큰 상처를 받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준 경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양쪽의 경험 모두 다. 그 상처는 미안하다는 사죄 정도로는 결코 메울 수 없으며, 애초에 메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나의 반성이 저들에게 받아들여질리 없고, 나는 그들의 사과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이런 감정의 일방통행은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다. 결국 한때 자신이 그들을 사랑했었다는 기억조차 잊고 만다. "나는 내가 사랑했다는 것을 안다. 오직 그것만이 내 오랜 기억의 밑바닥으로부터 내게 도달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알고 싶다."(207쪽) 오늘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들춰보면, 그곳에서 자신이 먼저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의 감정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니까 소설 <이아생트>의 화자는 버림받았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버림으로써 그에게 준 상처를 뒤늦게나마 감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마치 그것은 더 이상 나라는 사람, 내 몸이 아니라 그것들의 모방인 듯했다. 만일 내가 내 안 깊숙이 아직 단단한 받침 위에 등불의 예식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새로운 착란은 나를 어디까지 데려갔을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등불만이 동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리서 그것은 내 광기를 비추고 있었다."(1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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