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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사랑이라니, 선영아> (1) 사랑이라니요, 연수 님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8. 13. 16:09

본문

1.

이 책의 표지는 노랗다. 일부만 노란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노랗다. 이렇게 표지가 전체적으로 노란색을 띤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심지어 표지의 절반 정도 감싸고 있는 커버 이미지도 전반적으로 노랗다. 노란 풍선들이 한 여자의 얼굴을 가린 채 둥둥 떠 있는 것이다. 노랗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 색은 내가 어려서부터 제일 좋아한다고 믿었던 빨간색에 이어 내가 좋아하는 색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빨간색이 여전히 좋기는 하지만, 그 색은 주변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주변의 시선을 뺏는 독보적인 색. 노랑이라고 다를 건 없었지만 그래도 빨강보다는 주변과 어울릴 수 있었다. 어쩌면 내 경향이 빨강에서 노랑으로 내려온 만큼 유연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2.

<사랑이라니, 선영아>에는 한 편의 소설과 한 편의 평론이 담겨 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이 책에 담긴 평론에서 김연수가 서술어를 중심으로 장면과 인물을 배치하고 성격을 규졍하는 기법을 쓴다고 평했다. 그는 레비 스트로스를 인용하고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 속 구절을 열거하며 김연수의 지적 능력과 열망을 칭찬했다. 분명한 것은 김연수 작가가 공부를 했으면 굉장히 잘 했으리라는 사실이다. 그가 평론가에게 칭찬 받는 법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암기 능력만 뛰어나서는 안 된다. 무엇이 시험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것인지를 잘 파악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소설가 김연수는 어떤 점이 어떻게 대중과 평론가의 눈에 띄게 될지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칭찬받는 법을 잘 아는 작가라는 게 나쁜 요령일 수는 없다. 다만 그 정교함이 마음에 걸린다. 나는 완벽한 외모에 매너를 자랑하는 사람보다는 잘 하는 듯하면서도 뭔가 약간 서툰 사람에 호감을 갖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여러 기술들을 정교하게 뭉쳐놓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한 사람이 소설가인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잘 쓰이지 않는 특이한 어휘와 속담을 구사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온갖 비유를 들어가며 지적 능력을 뽐내는 주인공에 평범한 직업을 줄 수는 없는 일이었을 테다. 지적인 소설가를 주인공의 한 축에 놓음으로써 그는 소설의 개연성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그 주인공을 통해 김연수 자신의 입담과 지적 능력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 역시 뛰어난 소설가다운 기법이었다.


하지만 그 의도가 눈에 드러나는 기법은 곧 식상해지기 마련이다. 현대의 흑백 사진이 아무리 자신의 의도를 색다르게 꾸미려 해봐도 흑백이 풍기는 그 원초적인 욕망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몇 번 정도는 자신의 능력, 특별한 관점, 걸출한 재능을 뽐내기 위해 지적 재주를 부릴 수 있으리라. 알랭 드 보통의 초기 소설을 보면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 지속되는 이미지는 특수 조명이 만들어 낸 보석의 화려한 반사광을 손가락마다 끼고 있는 하얀 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빛 아래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거친 손이다.



3.

그 누구도 자신있게 김연수의 소설 기법이 촌스럽다거나 현학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고자누룩하고, 아령칙하며, 보깨고, 게접스러운데다가, 얼멍얼멍한 듯하면서도 살찬' 그의 어휘들을 보고 있자면 그를 현학적이라 규정하고 싶은 생각이 차오를 테지만 말이다. 평론가가 썼듯, 그의 그런 기법은 특이한 술어를 중심으로 인물과 구성을 배치한 놀라운 실력을 드러낼 뿐이고, 그 능력을 소설 속에 잘 녹여냈기 때문에 젠체하는 것이라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는 것과 어휘의 배치에 어떤 연관이 있을까? 평론가가 설명해준 그런 기법들은 독자가 이 소설을 통해 사랑을 이해하려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다. 사랑은 사랑이고, 그런 어휘 용례는 용례대로 그저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은 테크닉이고, 코드화 가능한 기호이며, 따라서 스투디움에 머무른다.


물론 그 현상을 또 하나의 세련된 기법으로 예찬할 수 있기는 하다. 바로 소설가 김연수가 그렇게 사랑과는 유리된 기법들(생소한 어휘, 과도한 비유, 뜬금없이 등장하는 인문학 이론)을 자신의 소설에 등장시킴으로써, 사랑은 소설을 읽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설에 등장하는, 혹은 실제의) 소설가란 사랑을 겉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로, 결국 사랑을 포장하는 능력이 뛰어날 뿐인 가난한 존재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내려 했다는 것이다. 


나의 이런 추측이 과연 사실일까? 알 수 없다. 다만 내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곧 출간할 소설을 평론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다면 어떻게든 좋은 의도를 드러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내가 서두에서 빨강에서 노랑으로의 이행이 마치 유연한 존재의 증명이라도 되는 듯 꾸며댔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난 여전히 빨강이 주는 전형적인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 게다가 난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이 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듯하다. 


"사랑이라니요, 연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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