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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기획, <중세> 1권 - 시시콜콜한 문제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2. 1.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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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역사서들의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될지도 모를 이 시리즈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찬사를 보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는 이 번역서에도 앞으로 더 발전할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훗날 새로운 판으로 재탄생하게 될지도 모를 움베르토 에코의 이 중세 시리즈를 위해, 이 시리즈 중 제1권에서 나타난 몇 가지 시시콜콜한 문제들을 <전체 서문>에 한정하여 언급하고자 한다. 이 문제들은 이탈리아 원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1.

<전체 서문>의 일부인 24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예를 들어 14세기에 락탄티우스는 <신학체계>에서 이러한 근거를 토대로 지구가 둥글다는 이교도의 이론에 반박했는데, 인간이 머리를 숙이고 걸어야 하는 땅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24쪽)

 

이 부분의 실수는 락탄티우스를 14세기 사람이라고 쓴 것이다. 락탄티우스는 3~4세기 사람이다. 그 문장이 오류라는 사실은 락탄티우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알아챌 수 있다. 왜냐하면 같은 쪽 말미에서 "사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하여 어느 누구도 락탄티우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4~5세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혹은 그가 10세기 이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전체 서문>의 앞장에서 이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토마스 사이를 가르는 시간이 적어도 8백 년이고, 성 토마스와 우리를 가르는 시간도 대략 8백 년이다"(13쪽)라고 서술한 부분을 기억하고 있다면,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락탄티우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취지의 문장이 문맥상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2. 

다음의 문장을 보자: "콜럼버스가 포넨테를 통해 레반테에 도착했을 때 무엇을 보여 주려고 했는지, 또 살라망카의 학자들이 무엇을 적대적으로 거부했는지를 교양 있는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대부분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했던 반면에 살라망카의 학자들은 지구가 평평하며 바다로 나아간 돛단배들은 곧 우주의 심연 속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라 생각했다고 대답할 것이다."(24쪽)

 

문제는 '포넨테'와 '레반테'이다. 그냥 보면 두 명칭은 지명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넨테나 레반테가 명확히 지명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레반테는 스페인 축구팀 이름이며, 비슷한 명칭이라 할 수 있는 레반트(레반테를 스페인어로 보면 영어로 레반트가 된다)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우르는 곳으로, 콜럼버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레반테'라는 지명이 포르투갈, 이탈리아를 비롯한 몇몇 곳에서 쓰이고 있으나 문맥을 보면 원서 저자가 그것을 고려하여 썼다고 보기 어렵다.

 

이탈리아어로 포넨테(Ponente)는 서쪽, 레반테(Levante)는 동쪽이란 뜻이다. '레반테'라는 단어가 어느 곳의 동쪽 지역에 해당하는 곳에서 종종 쓰이는 단어라는 걸 생각하면, 이 단어는 특정 지역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동쪽에 해당하는 곳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보통명사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위 문장은 "콜럼버스가 서쪽(서방)에서 출발하여 동쪽(동방)에 도착했을 때"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그런 해석이 문맥에도 맞다. 고유명사도 아닌 것을 한글 문장 중간에 아무런 기호 첨가도 없이 이탈리아어 발음 그대로 적는 것은 좋지 않다. 이탈리아 원서에는 해당 문장의 두 단어가 대문자로 쓰여 있는데("colombo volesse dimostrare quando intendeva raggiungere il Levante per il Ponente"), 그렇다 하더라도 한국 독자를 대상으로 번역한 책에,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표현을 그대로 쓴 것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처사이다. 정 대문자 표기를 감안하고 싶었다면 주석 처리를 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이탈리아 원서에서 'Levante'라고 적고 있는 이 단어는 책의 다른 곳에서도 가끔씩 등장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위와 다르게 '레반테'가 아닌 '레반트'로 번역해서 적고 있다. 이때는 비잔티움이나 이슬람이 차지했던 지역, '레반트'를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3. 

이번에 지적할 오류는 다소 심각한 것이다. 의미가 반대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suspect'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아서 나온 문제이다: "물론 콜럼버스도, 살라망카의 학자들도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또 다른 대륙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25쪽) 이 문장은 기존의 배경 지식와 충돌을 일으킨다. 위 예문은 마치 콜럼버스와 살라망카 학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즉 앞의 문장은 "콜럼버스와 살라망카의 학자들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또 다른 대륙이 있다고 확신했다"라는 뜻으로 이해되기 쉽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을 볼 때 말이 되지 않는다.

 

"suspect"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에는 이를 단순히 "의심하다"라고 번역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앞서와 같은 문제로 생기게 된다. 따라서 굳이 '의심'이라는 단어를 번역 과정에서 쓰고 싶었다면 다음과 같이 고쳐야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된다. "물론 콜롬버스도, 살라망카의 학자들도 어쩌면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또 다른 대륙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해 보지는 않았다."

 

위 문장의 오류가 발견된 것은 배경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지식이 없다면 번역 문장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지식의 방대함을 생각하면 위와 같은 번역은 상당히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4.

번역의 기준을 이탈리아 원서에 뒀는지, 아니면 우리에게 이미 잘 알려진 영문명에 뒀는지 확실하지 않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어 원서에서 "Beato Angelico"라고 칭하고 있는 15세기 화가를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프라 안젤리코"(26쪽)라고 쓰고 있다. 이탈리아 원서를 기준으로 했다면 "베아토 안젤리코"라고 했을 것이다. 이걸 보면 이미 우리나라에 "프라 안젤리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혹은 영어권에서 그렇게 쓰고 있기 때문에) 굳이 명칭을 바꿔가면서까지 기존의 경향을 따른 듯 싶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영어권 모두 "T-O 지도"라고 표기하고 있는 지도 명칭은 굳이 이탈리어 원서 표기("mappa a T")를 그대로 따라 "T map"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T map"이라고 하면 모 이동통신회사의 네이게이션 지도를 떠올리지, 중세의 T-O map을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5.

이것은 번역의 섬세함에 관한 문제이다. 다음 문장을 보자: "하느님은 태아가 일차적으로 식물성 영혼을 획득하고 이윽고 감각적인 영혼을 획득할 때만 태아에게 영혼을 삽입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 순간에만 이미 형성된 육체에서 이성적인 영혼이 창조되는 것이다. 태아는 오직 감각적인 영혼만 지니고 있다."(45쪽)

 

이 문장을 자꾸 읽다 보면 어디선가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위화감은 '태아'라는 단어를 구분해서 번역하지 않은 탓이 크다. 이탈리아 원서에서는 태아를 'feto'와 'embrione' 즉, '태아'와 '배아'로 구분하고 있는데 한글 번역서에는 일률적으로 태아라고 적고 있다. 태아와 배아는 8주(혹은 7주)를 기준으로 구분하여 정의되고 있으므로 번역 역시 그런 기준을 따라 정확하게 해야 했다. 이런 작은 차이도 구분하여 번역하는 것이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한 밑거름이다.

 

 

<전체 서문>에서 발견한 오류만 벌써 이 정도라서 이 방대한 책을 읽기에 앞서 걱정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이 역서가 설마 곳곳에서 잘못된 번역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하지만 이런 대규모 분량을 번역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실수는 당연한 것이라는 관대한 관점도 솟아오른다. 따라서 난 움베르토 에코가 <전체 서문>의 마지막에 쓴 문장을 교훈 삼아, 그 문장을 다음과 같이 한 단어만 제외한 채 그대로 옮겨 적고자 한다: "이 해묵은 논쟁에서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일화가 우리에게 '번역의 시대'에 대해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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