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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 기획, <중세> 1권 - 몇 가지 오역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3. 15.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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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움베르토 에코 기획의 <중세 1권>에 나타난 번역상의 '시시콜콜한 문제들'을 다룬 적이 있다. 이번엔 그에 이어 '몇 가지 오역들'을 나열해 보았다.


 

1.

이 책의 59쪽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382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고트족과 체결한 동맹으로, 아드리아노플의 재앙을 맞은 서고트족의 트라키아 정착을 허락한 동맹이다."(59쪽)

 

이 문장을 보면 아드리아노플의 재앙을 맞은 것이 바로 '서고트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대패를 당한 건 서고트족이 아니라 동로마제국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따라서 위 번역 문장은 역사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탈리아 원문이 잘못된 것일까? 그 부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Tra i piu importanti foedera di questo tipo ci sono certo da ricordare; quello stipulato nel 382 da Teodosio I con i Goti, cui e consentito di stanziarsi in Tracia in seguito al disastro di Adrianopli;"

 

문제의 부분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아드리아노플에서 재앙이 발생한 이후 트라키아의 정착을 허락했다." 즉, 이탈리아 원문과 한글 번역문은 뜻이 완전히 다르다. 역자 혹은 편집자가 작업 중에 단어 하나를 실수로 빠뜨렸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번역 문장에 단어 하나만 추가하면 문장의 뜻을 올바르게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드리아노플의 재앙을 맞은 (로마가) 서고트족의 트라키아 정착을 허락한 동맹이다."

 


2.

다음은 중세 프랑크 왕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는 잘못된 내용이다: "898년에 일어난 두 권력자의 죽음으로 프리울리의 백작이던 베렌가리오 1세는 귀족 회합을 통해서 이탈리아의 왕으로 선출되었지만, 카롤루스 뚱보왕에 의해 왕위를 박탈당했다."(264쪽)

 

위 번역문을 보면 카롤루스 뚱보왕이 베렌가리오 1세를 축출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카롤루스 뚱보왕은 888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898년엔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죽은 공명이 살아 있는 사마의를 도망가게 한 고사가 있긴 하지만, 이미 죽은 왕이 살아있는 사람의 왕위를 박탈하는 것은 일견 불가능해 보인다. 역사적으로 베렌가리오 1세는 카롤루스 뚱보왕에 의해 왕위를 박탈당한 사람이 아니라, 뚱보왕 사후에 왕위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이탈리아 원서 205쪽을 찾아보면 이 잘못된 번역이 원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3.

잘못된 번역이 다시 등장한다. 번역서 115쪽을 보면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고 쓰여 있는 부분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법전>을 편찬하도록 했다. 이 법전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115쪽)

 

독자가 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면, 번역서에 나와 있는 대로 <테오도시우스 법전>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164쪽을 읽기 전까지만 말이다. 번역서 164쪽에서 저자가 <테오도시우스 법전>의 내용을 참조하는 부분("테오도시우스 법전" XII, 1, 163)을 읽고 나면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실 <테오도시우스 법전>은 이미 몇 세기 전에 발견되었고, 이젠 라틴어로 된 법령 내용을 온라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럼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탈리아 원서에는 문제의 부분이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egli fa compilare un codice, noto come Codice Teodosiano, non giunto integro fino a noi." 즉, 테오도시우스 법전은 전해지고 있지 않은 게 아니라, "온전한 상태로" 전해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4.

'그리고'와 '그러므로'는 같은 단어가 아니므로 의미상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따라서 '그리고'를 써야 하는 곳에 '그러므로'라는 단어를 쓰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번역서 63쪽에 그 대표적인 예가 나온다: "이미 2세기에 겔리우스는 식민지와 시 당국을 구분하는 고전적인 의미가 상실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212년 혹은 214년에 (...) 도시를 다양한 등급으로 차별했던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63쪽)

 

앞의 두 문장은 '그러므로'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인과관계에 있는 문장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경우 의미가 잘 맞지 않게 된다. "겔리우스의 강조"가 원인이 되어 도시들의 등급 차별이 없어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탈리아 원서를 보면 이곳이 '그러므로'가 아니라 '그리고'로 쓰여 있다.

 


5.

자잘한 실수들도 많다. 자잘하긴 하지만 그 결과를 무시하기는 어렵다. 그 대표격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갈리시아(Galicia)를 갈리아(Gallia)로 잘못 번역한 걸 들 수 있다. 'Galicia'에서 알파벳 'c'를 보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단순한 실수는 엉뚱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갈리아의 위치는 현재의 북이탈리아, 프랑스 지역인 반면, 갈리시아는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쪽 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서에서 "820-830년경에 갈리아 지방의 콤포스텔라"(219쪽)라는 문장을 보게 되었을 때, 갈리아는 알아도 콤포스텔라는 잘 모르는 독자들은 콤포스텔라가 현재의 북이탈리아나 프랑스 인근에 있을 것이라 상상하게 될 것이고, 그보다 조금 더 탐구적인 독자들은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왕국들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 왜 갑자기 프랑스의 갈리아 지방을 언급하는 것인지 의아스럽게 여길 것다.

 

이 실수는 한 곳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다. 217쪽, 218쪽에 걸쳐 여러 번 등장하는 단어 '갈리아'는 모두 '갈리시아'를 잘못 적은 것이다.

 

'북동쪽'을 '북서쪽'으로 잘못 적은 것도 있다. 번역서를 보면 "이들은 북서쪽에서 독일과 슬라브 지역을 접하고"(221쪽)라고 되어 있는데, 프랑크 왕국의 북서쪽에 독일이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은 원서의 해당 부분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gettando un ponte culturale verso il Nord e l'Est germanico e slavo."

 

또 책 여러 곳에서 '프리기아'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책의 문맥에 따르면 이 '프리기아'라는 지방은 북유럽에 위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북유럽의 경우에 프리기아 지방의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주도했다"(303쪽)라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프리기아(혹은 프리지아)는 아나톨리아 인근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북유럽과는 관련이 없다. 네이버나 구글에서 검색해 봐도 북유럽에서 '프리기아'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프리기아 혹은 프리지아를 소아시아의 한 지명으로 알고 있던 독자들에게 혼선을 줄 수 있다.

 

원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Protagonisti del commercio settentrionale europeo sono i mercanti della Frisia. 따라서 혼동을 줄이기 위해 '프리시아' 혹은 '프리슬란트'라고 표기하는 게 적절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6.

고유명사 번역의 기준이 통일되지 않은 듯한 모습도 종종 보인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로다노 강'을 들 수 있다. 한글로 '로다노 강'을 검색해 보면 그런 강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원서의 'Rodano'를 발음 그대로 옮겨 적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 위치한 이 강의 프랑스식 이름은 'Rhône'이며, 따라서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론 강'이라고 적어야 한다.

 

번역자가 (프랑스에 있는 이 강을) 이탈리아어 'Rodano'에 맞춰 번역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번역의 통일성을 위해 '도나우 강'은 '다누비오(Danubio) 강'으로, '비잔티움'은 '비산치오(Bisanzio)'로 번역해야 했다.

 


7.

이번에도 번역의 섬세함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번역서 33쪽을 보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묵시록'을 읽고 해석해 보면, 인간 역사의 어느 시기에 사탄이 천 년 동안 갇힌다는 말이 나온다."(33쪽) 

 

이탈리아어 원서에 요한계시록 10장(Qeullo che rende affascinanete l'Apocalisse al Medioevo e l'ambiguita sostanziale del suo capitolo XX. Interpretato alla lettera, questo capitolo deice che, a un certo punto della storia umana, Satan viene imprigionato per mille anni.)이라고 명확하게 쓰여 있음에도 번역서에서는 '10장'이라는 단어가 빠졌다. 원서에서 친절히 가리키고 있는 부분을 굳이 삭제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사탄이 천 년간 갇힌다는 부분이 요한계시록 어디에서 나오는지 잘 아는 독자는 상관없을지도 모르나, 잘 모를 대부분의 독자들을 위해 원서를 따라 '10장'이라는 단어를 포함시키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읽으면서 내용의 진위를 따져보고 싶은 부분들이 더 있었으나 그 모두를 찾아가며 읽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업 번역가도 아닌 내 눈에 이 정도의 문제가 발견되고 나니 문득 번역가 이윤기의 일화가 떠올랐다. 2000년 4월에 한국번역가상을 수상했던 이윤기는 그해 3월 철학박사 강유원에게 60여 쪽의 원고를 받게 되는데, 그 원고는 이윤기가 번역했던 <장미의 이름>에 나타난 오역을 지적하는 내용이었다. 이윤기는 그 원고를 참고하여 260군데의 잘못된 번역을 바로잡은 뒤 같은 해 7월 세 번째 개정판을 내었으며, 그 후 강유원에게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어쩌면 움베르토 에코가 기획한 이 <중세> 시리즈도 그가 썼던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절차를 밟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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