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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채식하듯 무겁게, 혹은 육식하듯 가볍게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5. 16.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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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오 카츠의 <법은 왜 부조리한가> 혹은 한강의 단편 소설 <채식주의자> 중에서 어떤 책을 들고 나갈지 고민했다. 잠깐 생각하다가 얼마 전 새로 받은 <채식주의자>의 첫 페이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몇 줄을 읽은 뒤 곧 이 책을 들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소설을 읽지 않은지 꽤 되었다. 대신 인문교양서를 읽어왔다. 이렇게 오랜만에 소설책을 잡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소설의 좋은 점은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쳐 지나가듯 언급하는 역사적 사건 하나를 알아보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인문서적과는 달리, 소설은 그에 비하면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사람들은 누가 어떤 책을 읽었는지보다는 누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에 관심을 가지는 법이니, 그럴 때를 대비해 소설을 읽어두면 대답하기에 유리해진다. <서양철학사>를 1년에 거쳐 읽느라 다른 10권의 책을 못 읽으면 지탄을 받지만, 간편한 소설 10권을 읽느라 <서양철학사> 1권을 못 읽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나는 쉽게 다독왕이란 타이틀을 얻어 주변의 쓸데없는 시선에 대한 면죄부를 받기로 결심했다. 이 소설도 그 길 위에 있었다.



2.

한강의 이 '옛' 단편소설에는 세태를 반영하듯 처음부터 성적인 내용이 등장했다. 이 짧은 단편 소설의 첫 부분부터 유두와 성기라는 단어가 나왔다. 등장인물들의 신경증을 다른 상징물로 대체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작가는 굳이 상당히 자극적인 단어를 택했다. 어쨌든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니, 나는 그 자극적 단어들 역시 소설가 한강이 대중적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한 흔적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강은 자신의 작품이 대중친화적으로 느껴지길 원치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근친간의 은근한 치정, 가정 내 폭력과 자해라는 극단적 상황이 마치 TV 드라마 소재인듯 아닌듯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게 만들고, 그 와중에 자신의 소설이 '작품성'을 띠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


<채식주의자>의 여자 주인공은 자신이 한때 살아 숨쉬는 것을 먹었다는 것에 갑작스러운 혐오를 느낀다. 소설 속의 이런 상황은 실제로 잘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갈등은 결혼 후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청소년기에서 이십대 초반 사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이 개미들을 밟아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잠자리의 날개를 뜯는 걸 보면서 그녀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봤어야 했다. 어쨌거나 나이가 든 후에라도 죄의식, 혹은 육식이라는 원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사고가 그만큼 풍성해질 테지만, 기반과 주관이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닥치는 어지러운 고민은 그 사람에게 큰 혼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그녀는 다소 예외적인 상황이라 볼 수 있는 후자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타인의 정신적 고통을 다루는 건 어려운 과제이다. 누군가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는 '단 하나의' 근원을 찾아내기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그녀는 육식을 거부하는 행위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지만, 동시에 다른 노력은 거의 하지 않음으로써 그녀가 받는 고통이 전적으로 외부의 책임만은 아니라는 메시지를 남기게 되었다. 무엇이 근원적 문제인지를 알 수 없는 난해함과 소통 부재는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의 고통을 계속 가중시킨다. 주인공이 드러내는 이런 극단적인 형태의 수동적 자세와 불협화음도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예외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소설의 구조는 (한강은 현실적인 소설을 쓴다는 세간의 평과는 달리) 환상적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은 다소 이와 같다. 주변의 인물들은 모두 전형적이며, 비극적 주인공은 자신의 새로움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만일 주인공이 역경을 극복하여 성공한다면 '영웅전'이 될 테고, 실수와 극복을 반복하여 적응하며 살아간다면 '현실적'이 될 것이다. 작가 한강은 자신을 거의 설명하려 하지 않는 주인공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내버려 둠으로써 '환상적'이 되는 걸 택했다. 이런 환상성은 이 단편 소설이 마치 슬픈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만든다. 소설의 말미에서 독자는 이 소설이 전하는 비극적 상황에 취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어떤 소설 작품을 장중한 클래식 음악에 비유할 수 있다면, <채식주의자>는 3분 내외 길이의 슬픈 음악, 피아노 소곡 정도가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한강은 <채식주의자>에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멜로디를 깔고 사람들의 귀를 잡아 끄는 자극적 리듬과 감성을 흔드는 엇박을 심어 놓았다. 따라서 이 소설은 전체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채식으로 가꾼 몸처럼 가벼워졌지만 어떤 맥락에만 집중하면 극단적인 채식이 낳은 부조화처럼 기이해졌다. 


게다가 이 띄어쓰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관형사와 명사의 띄어쓰기를 거의 모조리 무시한 한강의 글쓰기 방식을 휴대전화의 메모장에 어렵사리 남기면서 난 음악적 취기에서 확 깼다. 이건 숙취가 없는 술인가? 채식을 하는 코끼리의 육중함, 육식을 하는 사자의 날렵함---기이한 일 아닌가? 난 지하철에서 내리며 책을 덮었고, 다독왕에 성공적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갔음을 확신했다. 어쨌거나 나의 관심은 그것이었다. 사람들도 내가 <채식주의자>라는 소설이 아니라 그저 <책 1권>을 더 읽었다는 것을 칭찬할 것이니. 500쪽짜리 책 1권을 읽은 것에 대한 무관심, 50쪽짜리 책 10권을 읽은 것에 대한 열렬한 칭찬---기이한 일 아닌가? 세상의 이중성에 대한 파악과 그에 대한 노력, 그것이 없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러운 채식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4.

이중성과의 힘겨움 싸움. 그것을 완전히 극복해내자 나는 동박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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