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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활자 인쇄, 믿음과 비관주의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1. 31.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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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대 이전의 목활자 인쇄는 어려운 기술에 속했다. 활자 인쇄는 각 글자나 자모별로 개별 도장을 만들어 인쇄하는 기술로, 커다란 판에 많은 글자를 한꺼번에 새기는 조판 인쇄보다 진보적인 기술이었다. 중국 북송시대 학자인 심괄은 <몽계필담>에 북송 대의 평민이었던 필승이 활자인쇄법을 발명한 사실을 기록해 놓았는데, 그 기록을 보면 나무는 결에 편차가 있고 물을 먹어 활판이 고르지 않으며 송진이 달라붙어 해체가 어렵기에 진흙으로 만든 것만 못하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필승은 어려운 목활자를 포기하고 진흙을 구워 만든 진흙활자에 전념했다.


해안사의 대장경판,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 경판도 '판'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할 수 있듯 활자가 아니라 조판으로 되어 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조판 인쇄가 대세였다. 간혹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세계 최고의 목판활자, 혹은 목활자라고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인쇄됐을 당시의 중국 당나라나 통일신라의 인쇄 기술로 볼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조판으로 인쇄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애초에 중국은 근대화 이전에 활자 인쇄를 주류로 삼은 적이 없다. 활자 인쇄를 1232년 이전에 발명한 이후 그를 주류로 삼은 우리나라[각주:1]와는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활자와 조판은 기술적으로 분명한 차이가 있다. 구텐베르크가 유럽에 일으킨 인쇄술의 혁명은 활자에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조판을 활자에 비해 떨어진다고만 할 수는 없다. 인쇄 속도는 느리고 범위도 제한되지만 조판이 찍어내는 단일한 결과물 내에서는 뛰어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팔만대장경판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우리는 팔만대장경판에 경탄하고 유럽보다 빠른 활자 인쇄술에 자부심을 보이지만 안타까운 점이 없지는 않다. 이렇듯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도 민간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 것이다. 유럽이 금속활자의 발명 이후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하게 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는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도 상위의 식자 계층만 그 정보를 공유하여 발명의 결과를 확산시키지 못했다. 상공업의 천시, 왕권의 인쇄물 통제, 조정이 주도하는 교육, 제한적인 한글 보급, 이렇게 정적인 시대 분위기가 그에 일조했다. 중세 유럽 역시 왕권이 인쇄에 개입하여 특정 서적의 출판을 장려하거나 금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상공업이 발달해 있던 터라 금서 지정은 오히려 더 높은 가격에 은밀히 거래되는 현상을 야기했다. 정예푸는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활자 인쇄가 주류가 된 이유를 두고 고려와 조선 사회는 지식을 소수의 귀족과 양반, 사제들이 차지했기에 책을 많이 찍어낼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소량 인쇄에 유리한 활자가 발달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폈다.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선조들은 세종대왕 대에 훈민정음을 만들고 이를 금속 활자로 만들어 최초의 한글 활자인쇄본인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했다. 목판으로 현존하는 팔만대장경판도 만들었다. 그러나 한글과 인쇄술 모두 아래로의 파급력은 강하지 못했으니 다시 빛을 보기까지 꽤 오래 세월을 견뎌야 했다.



2.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다소 단순했다. 당시 지배층은 지난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막고자 초조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그때 거란군이 물러간 바 있으니 금번의 몽골 침략도 대장경을 만들어 물리치자는 생각을 했다. 초조대장경판은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에 보관해 두었는데 그걸 몽골군이 불태워 조판을 다시 해야 했고, 그래서 만든 것이 두 번째 대장경인 재조대장경, 이른바 팔만대장경이었다. 


이렇게 몽골 제국의 침입을 불력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오늘날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그런 시각은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팔만대장경을 연구했던 일본 학자들이 고려 조정이 외적의 침입을 미신에 기대 물리치려 했다는 비판을 가하면서 가중되었다. 국내 학자들은 팔만대장경의 미신론에서 벗어나고자 여러 다른 제조 가설을 연구했지만, 이규보가 남긴 기록과 고려 고종이 내린 칙령을 보면 재조대장경이 진병대장경, 즉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한 불경이었음은 명확해 보인다. 


그런데 13세기에 아시아와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몽골군을 불력을 빌어서나마 막고자 했던 게 정말 부끄러운 일일까? 난해할 수밖에 없는 종교와 미신의 구분을 뒤에 놓는다고 하더라도 이성의 한계가 문제로 떠오른다. 현대의 행동경제학은 인간이 제한적으로 합리적일 뿐이라는 이론을 제시하고 과학철학은 과학적 사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지금도 그러하니 13세기의 일을 두고 오늘날 미신이라 공격하는 것은 과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 선조들에게 재난이 닥쳤을 때 무속이 없었다면 그들은 쉽게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믿음이 없는 사회는 지속하기 어렵다. 오늘날 사회, 특히 젊은 세대가 비관주의에 물들고 있는 것은 한편으론 믿음이, 특히 공동체에 대한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성의 힘을 믿었고 그래서 감정과 믿음을 배제했으나 재난이 닥치자 드러난 것은 합리성이란 저울질에 점령되어 기댈 곳을 잃은 초라한 모습의 이성이었다.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 우측 끝과 중앙부에 있는 두 채의 건물로, 이곳에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합천 해인사, 2012. 6.24.



  1.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28권의 책을 주자하여 인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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