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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 감은사지 삼층석탑, 이견대 답사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2. 16.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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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울산이란 도시는 이름만 들어보았을 뿐 가본 적이 없었다. 아내는 가끔 동해안을 여행하며 울산도 들렀던 모양이나 나에겐 무척 생소한 도시였다. 울산으로 가는 첫날, 우리는 서울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남동쪽으로 내려가다 동해안 인근에서 국도로 빠진 후 구불구불한 바닷길을 이용해 울산으로 내려갔다. 마냥 빠른 길을 택하기보다는 지방도를 타며 인근 지역을 천천히 눈에 담고 싶었다. 그렇게 31번 국도와 지방도를 번갈아 타며 내려가는데 문득 아내가 근처에 문무대왕릉이 있다고 말했다. 우린 곧 차들이 제법 주차된 해변에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리자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강한 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왕의 능이라는 이름에 비해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내판은 해져 곳곳이 갈라져 있었고 안내판 상부의 못에서 흘러나온 녹이 화강암 기둥 아래쪽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앙상한 철골만 남은 제법 커다란 구조물이 안내판 옆에 서 있어 황량한 기운을 더했다. 해안 침식을 방지하고자 쌓아둔 모래주머니는 남루한 어깨를 드러내었고 곳곳의 쓰레기들은 자신들이 해변의 주인인 양 자갈밭 주위를 넘나들었다. 멀리에선 무속인들이 어딘가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건너편에 문무대왕릉이 있었다.


난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문무대왕릉을 바라보았다. 오래전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문무대왕릉을 사진이 아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해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바다에 있는 조그마한 암초에 왕릉이 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수중 왕릉은 일종의 설화, 민간에서 떠도는 전설 같은 것이겠거니 했다.



2.

비록 떠도는 설화처럼 느껴지긴 하였으나 바다 위 문무대왕릉과 연관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삼국사기에는 "군신이 유언에 따라 동해구의 대석 위에 장사지냈다. (...) 그 돌을 대왕석이라고 불렀다"[각주:1]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고, 삼국유사에는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을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을 감은사라고 이름했으며, 뒤에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고 하였다"[각주:2]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문무대왕릉이라 추정되는 곳에서 서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는 1979년 발굴 시 '감은사'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감은사지터라는 게 밝혀진 감은사지가 있었고, 그보다 더 가까운 곳엔 이견대가 있었으니 삼국유사에서 대왕암이라 칭한 암석이 오늘날 이름처럼 문무대왕릉일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누군가 온전히 창작한 내용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왕릉이라는 이름은 과장으로 드러났다. 지난 2001년 방송사와 학자들의 대왕암을 합동 조사하였는데 대왕암 주변에서 왕릉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대왕암 가운데에 석관 뚜껑처럼 보이는 거대한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무덤으로 추정했던 그 돌덩이 아래쪽엔 수직으로 형성된 암반 절리만 있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대왕암은 전설처럼 유골을 안치한 왕릉이 아니라 화장터라는 데에 무게가 실렸다. 이는 문무대왕비의 해석 결과와도 일치하는 바가 있었다. 


대왕암 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나름의 결과를 얻어내기는 했으나 굳이 발굴 조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발굴 조사를 하지 않더라도 대왕암이 세계 최초의 수중 왕릉이라기보다는 문무대왕의 장사를 지낸 곳 혹은 유해를 뿌린 곳으로 추정하는 게 더 합당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문무대왕비문의 내용이 이미 그러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지은 유홍준 선생은 1권 경주편에서 이를 신랄하게 비판한 바 있다. "(대왕암이 문무왕의 해중릉이라는 떠들썩한 보도는)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종의 사기극 같은 것이었다. 알고 있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과대포장해서 마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양 매스컴을 휩쓸었던 것이다."[각주:3] 그러나 지금도 이 암석엔 문무대왕릉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왕릉이 아닌 걸 알면서도 지금도 왕릉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부나 학계도 이미 굳어진 이름으로 생각하는지 이를 바꿀 생각은 없어 보인다.



3.

울산에도 대왕암이 있다. 울산의 대왕암은 경주의 대왕암과는 달리 해안과 가까워 다리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대왕암에도 문무왕이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일부 온라인 백과사전과 지도는 울산의 대왕암이 문무왕의 무덤이라는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었다. 대왕암이라는 이름이 양쪽에서 동일하게 쓰이고 일부에서는 둘 다 문무왕의 무덤이라고 서술하고 있어 혼동을 주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대체로 경주의 대왕암은 문무대왕릉으로, 울산의 대왕암은 그저 대왕암 혹은 대왕암공원이라 칭하여 구분하고자 하는 것 같다.


울산의 대왕암은 경주 대왕암과는 달리 왕릉을 기념하는 시설이 없다. 인근에 사찰도 없고 이견대 같은 정자도 없다. 그러니 울산의 대왕암은 문무대왕과 연관이 있기보다는 설악산의 울산바위처럼 웅장한 자연물에 깃들곤 하는 민간 설화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야겠다. 다만 관광지로서의 인기는 울산의 대왕암이 훨씬 높은 듯하다.



4.

감은사지와 이견대를 방문한 건 더 훗날의 일이었다. 한번은 경주에서 울산으로 향하던 밤에, 또 한번은 포항으로 가는 길에 각각 들렀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크기가 웅장하여 멀리서도 제법 잘 보였다. 상륜부의 기다란, 마치 기다란 창을 꽂아넣은 듯한 구조물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훗날 누군가 일부러 심어 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붙어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 앙상한 흔적일 수도 있었다. 이 창 혹은 꼬챙이 같은 상륜부의 모습은 워낙 특이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 봐도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의 표지에 나와 있는 탑이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라는 것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렇게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직접 마주하고 있자니 이 석탑이 몸에 무기를 지닌 채 나라를 지키고자 서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상상은 용으로 변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문무대왕의 바람과도 이어져 있었다. 


감은사지는 발굴을 시작한 지 오래되었는데도 두 개의 삼층 석탑 외엔 보이는 건축물이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가까이 다가가 석탑의 기단을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로 울타리도 작았다. 기록을 보면 방문객들이 이 석탑을 어루만지는 것은 물론, 석탑에 올라가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유홍준 선생의 제자가 "올라가 매만지며 즐거워하였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래도 우리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때는 밤이었는데, 여러 조명이 두 개의 석탑을 비추고 있어 제법 운치가 있었다. 



5.

만파식적의 전설이 남아 있는 이견대는 도롯가에 홀로 세워져 있었다.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법도 했다. 하지만 제법 인기가 있는 곳인지 우리가 있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들러 주위를 살폈다. 이견대에 오르니 정자 중앙으로 문무대왕릉이 보였다. 마치 계산이라도 한 듯 정자의 기둥 가운데에서 문무대왕릉이 떠올랐다. 기록에 따르면 이견대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 같은 곳일 테지만 아이에겐 그저 뛰어놀 수 있는 커다란 마당과 다름 없었다. 우리는 이견대를 들렀다 가는 사람들 중 가장 오랜 시간 그곳에서 머물렀다. 아이가 재미있어하여 기다린 것도 있었지만 주변의 풍광과 전설이 우리를 잡아끈 것도 있었다. 나는, 우리는 쉽게 떠나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였다. 그 아쉬움이 정확히 무엇인지 지금도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다.


문무대왕릉 안내판. 경주시 봉길리. 2019. 4.15.


문무대왕릉과 아내, 아이. 경주시 봉길리. 2019. 4.15.


이견대 정자. 경주시 대본리, 2019.10. 4.


이견대 정자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경주시 대본리, 2019.10. 4.


측면에서 바라본 이견대. 경주시 대본리, 2019.10. 4.


<감은사지의 밤>, 감은사지 삼층석탑. 국보 제112호. 경주시 용당리, 2019. 9.10.


감은사지터의 옛 모습. 석탑 뒤에 늘어선 초가집들과 그 앞의 포플러 나무(아마도 양버들)들이 인상적이다. 사진 출처: KTV 국민방송 KTV 대한늬우스, 1967. 5.27.



  1. 김부식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편 21년 [본문으로]
  2. 일연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만파식적 [본문으로]
  3.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창작과비평사 2002), 1권 161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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