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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의 미루나무, 고흐의 사이프러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1. 8. 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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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랑스 작가 앙리 보스코는 어린이를 위해 쓴 <아이와 강>에서 프로방스 지방의 자연을 풍부하게 묘사했다. 이때 종종 등장하는 게 미루나무다. <아이와 강>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파스칼레는 "자작나무와 미루나무가 가득히 자라는 넓은 섬"[각주:1]에서 모험을 시작한다. 마침 난 그 전날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실은 어린이용 책에서 사이프러스 나무[각주:2]를 유심히 보았던 터라 그와 생김새가 유사한 미루나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

미루나무는 우리가 흔히 포플러라 부르기도 하는 북미산 외래종 나무로, 도시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오래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는 미루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심었다고 하는데 난 아직 미루나무로 된 가로수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로수 하면 으레 플라타너스, 벚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를 떠올리게 된다. 메타세쿼이아나 이팝나무가 늘어나고 있긴 이 역시 쉽게 접하기는 어렵다. 


과거 국내에 가로수로 많이 심었다는 미루나무는 아마도 양버들일 것이다. 당시는 식물의 호칭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던 시절이라 미루나무, 양버들, 이태리포플러, 심지어 사시나무와 버드나무까지 섞어 이리저리 편하게 부르곤 했다. 하지만 미루나무와 양버들은 겉보기에도 수형이 다르므로 문외한이더라도 구분해서 부를 필요가 있다.  


몇 달 전 대구수목원에서 양버들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키가 워낙 커서 가까이에서는 카메라에 담지 못할 정도였다. 대구수목원은 이 나무의 기둥에 친절하게 '양버들'이란 이름과 설명을 붙여 두었는데, 그럼에도 대구수목원의 같은 나무를 가리켜 미루나무라 부르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대구수목원의 양버들. 대구, 2019.10.21.


대구수목원의 양버들 이름표와 수피. 대구, 2019.10.21.



3.

작년 여름 태화강 국가정원을 방문했을 때 아내가 저길 보라며 감탄 어린 투로 소리친 적이 있었다. 아내가 가리키는 곳에는 저물어 가는 태양이 숨어 있는 길쭉한 수형의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나무를 가리켜 미루나무라고 소개하는 글들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수형을 보면 미루나무가 아니라 양버들일 가능성이 크다.


태화강 국가정원의 기다란 나무. 수형으로 보아 양버들처럼 보인다. 울산, 2019. 8. 1.



창녕 우포늪은 습지로 유명하지만 그곳의 식물들도 제법 이름이 나 있는 편이다. 특히 산책길의 길쭉한 나무들이 사진사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데, 그 나무들을 가리켜 미루나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양버들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우포늪의 그 나무들은 미루나무도 아니고 양버들도 아니다. 이들은 그와 유사한 이태리포플러다. 다행스럽게도 우포늪 홈페이지에는 이태리포플러라는 정확한 설명이 올라와 있었다.


창녕 우포늪의 이태리포플러. 사진출처: 창녕군 우포늪 홈페이지(http://www.cng.go.kr/tour/upo/00001098.web)



4.

고흐는 1889년 5월 프로방스 지방의 생레미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때 그곳에서 고흐는 프랑스 남부의 사이프러스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사이프러스에 관한 글을 남겼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것을 소재로 <해바라기>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 사이프러스 나무를 바라보다 보면 이제껏 그것을 다룬 그림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이집트의 오벨리스크처럼 아름다운 선과 균형을 가졌다. 그리고 그 푸름에는 그 무엇도 따를 수 없는 깊이가 있다."[각주:3]


빈센트 반 고흐 <사이프러스가 있는 밀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1889년. 국내에선 사이프러스를 삼나무로 번역하여 <삼나무가 있는 밀밭>으로 표기하기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하지만 사이프러스와 삼나무는 같은 종이 아니므로 오역이다.



5.

미루나무와 양버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고흐의 사이프러스를 언급한 이유는 프랑스 작가 앙리 보스코가 소설 <아이와 강>에서 묘사하고 있는 지방 역시 프랑스 남부인 프로방스 지역이기 때문이다. 앙리 보스코는 아비뇽에서 태어나 니스에서 생을 마감했기에 프로방스 지역의 작가라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해 번역서인 <아이와 강>에서 나오는 미루나무가 실은 고흐가 아비뇽 남쪽으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생레미에 머무르던 시절에 바라보았던 사이프러스일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양버들일 수도 있겠다. 원서를 확인하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국내에서 미루나무가 잘못 불리는 경우가 많으므로 어쩌면 역자 역시 오해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외형은 상당히 닮았다. 파스칼레가 바라보았던 나무는 어쩌면 저 뾰족한 나무, 사이프러스가 아니었을까? 국내에 고흐의 작품을 소개할 때 사이프러스를 삼나무로 오역한 것처럼 번역 과정에서 식물 이름을 잘못 옮기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받은 재러드 다이아몬드도 '조'를 '기장'이라고 잘못 말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다이아몬드는 중국인이 최초로 작물화한 두 농작물이 기장과 벼라고 했는데(Jared Diamond, 1997, p.84), 이는 '조'를 '기장'이라고 잘못 말한 것이다. 조와 기장을 혼동하는 일은 이미 유래가 깊고 국내외로 파급되어, 중국 농업의 기원에 관해 토론할 때는 이름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각주:4]


하지만 사이프러스를 미루나무로 혼동했을지도 모른다는 내 생각은 단순한 추정일 뿐이다. 구글맵의 도움을 받으면 프랑스 남부 지역에 얼마나 다양한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는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고흐는 생레미 요양원 시절에 사이프러스뿐만 아니라 소나무, 올리브, 이태리포플러, 떡갈나무 등 여러 나무를 그렸다. 또한 <아이와 강>에는 '시프레'라는 이름의 나무가 몇 차례 등장하는데 이는 사이프러스의 프랑스식 발음이니 역자가 사이프러스와 미루나무를 혼동했을 가능성은 작다고 보아야겠다.



  1. 앙리 보스코 <아이와 강> 김화영 옮김 (비룡소 2012), 21쪽 [본문으로]
  2. 학명 Cupressus sempervirens. '사이프러스' 대신에 프랑스 발음을 따서 '시프레'라고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본문으로]
  3.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예담 2007), 259~260쪽 [본문으로]
  4. 정예푸 <문명은 부산물이다> 오한나 옮김 (378, 2018), 15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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