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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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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고 지낸지 벌써 5년이 넘었다. 이 정도면 그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와 하루 종일 같이 지내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같이 있을 때도 있지만 일주일에 한 번 보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래도 그를 충분히 알 만한 시간이었다.

그도 처음엔 나를 소중하게 다루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도 소홀히 하게 된다고 들었지만, 난 그는 그렇지 않을 거라 믿었다. 한때 그는 내가 있는 곳에서 직접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은 첫 마음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그는 자신의 말을 꽤 오랫동안 증명해 보였다. 그를 알고 지내 온 몇 년간 그는 나를 다른 사람의 손에 떠넘긴 적이 없었고, 사랑의 초입에 들어간 연인들이 흔히 그렇듯, 매번 나를 손수 씼겨주기까지 했었으니. 하지만 이제 그것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래도 난 그가 오래 버텨왔다고 생각한다. 기름칠하지 않으면 삐걱거리는 우리네 인생처럼 그들도 변하기 마련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기관리에 열심인 편이었다고 난 믿는다. 그는 매번 마치 처음 산 자동차의 길을 들이듯 나를 대하려 애썼다. 그는 감정의 가속 페달을 쉽게 밟아버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각을 핑계로 가속 페달을 주저없이 밟아대던 고속도로에서의 어느날처럼, 때론 감정이 급격히 무너지기도 했다. 그땐 나 역시 사고의 두려움에 떨어야 했지만, 그가 곧 원래의 그로 돌아올 것이라 믿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 나는 그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언젠가 내게 직접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한데, 오래된 기억이라 어렴풋하다. 그의 오랜 행동 방식으로 미루어 보건데, 그는 비 오는 날이면 집에 머무르는 때가 많았으니 그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엔 무리가 없어 보인다. 오늘 비가 왔으니 난 그가 집에 머물거라고 생각했다. 평소 그의 성향처럼. 하지만 그는 나를 불러냈다. 비 오는 하늘을 쳐다보는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다. 난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그가 서 있는  제주도라는 위치적 특수성이 그의 기분에 영향을 미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를 알고 지낸지 5년이 지났지만 난 아직도 그의 이름을 모른다. 그가 나를 만날 때 종종 데리고 나오던 동행자의 이름은 잘 알고 있다. 그는 그 사람을 항상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반면 그녀는 그를 '오빠'라고 부른다. 항상 그렇다. 난 이것이 일반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만의 성향인지를 알지 못한다. 한때 그는 내게 이름을 붙여 주려고 고민했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이름 짓기를 포기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난 실망해야할지 잠시 망설였다. 실망을 했다는 건 기대를 했다는 것인데,  기대를 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내 동료는 말했었다. 5년 전의 그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가 날 데려간 곳은 노란색 꽃이 끝없이 펼쳐진 길이었다. 그는 그 길을 '녹산로'라고 하는 것 같았다. 비는 그때도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는 비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그의 머리와 어깨가 비에 젖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때론 그의 카메라가 나를 향하는 듯했다. 나는 그가 벌이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피하고 싶었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으려 했다. 그가 날 찍으면 기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렌즈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주변에 차가 너무 많아." 그가 카메라 전원을 내리며 소리쳤다.

돌아가는 길에 그가 말했다.

"하늘이 맑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항상 맑은 날만 있는 건 아니잖아. 흐린 날도 있고 구름이 가득 낀 날도 있고 비 내리는 날도 있지. 하지만 우리가 보는 사진들은 매번 푸른 하늘이 배경이야. 이건 진실과는 거리가 있어. 4월의 유채꽃은 때때로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지만 우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거야.  우린 오늘 흐린 하늘에 비까지 내리는 환경에서 유채꽃 밭을 거닐었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진실을 마주한 셈이야."

그가 실제로 저렇게 말하지는 않았었다. 그가 한 실제의 말은 훨씬 더 간결한 단 몇 마디에 불과했다. 하지만 난 그걸 있는 그대로 기억할 능력이 없다. 되짚어 보건대 위와 같은 말을 하려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말들은 대개 미로 속에 있는 듯했다. 난 오늘도 그가 얼마나 진심을 담아 그런 말을 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때로는 진심인 것 같기도 했고, 때로는 비를 맞아가며 유채꽃 밭에서 사진을 찍어야 했던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자기위안 같기도 했다. 모르겠다. 그는 묻기 전엔 온전한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묻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만 같다. 그는 때론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래서 나는 묻지 않았고, 그녀도 묻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진흙탕 위를 돌아다녔던 탓에 내 신발은 더렵혀졌고 다리 위쪽으로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이 여기저기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날 힐끗 바라보고는 들어가버렸다. 그는 내게 우산도 씌워주지 않았고 작별인사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을. 아무리 나쁘게 대해도 자신을 버리지 않을 나라는 사람을. 그렇다면 다음엔 나도 그를 떠날 수 있음을 밝혀볼까. 그럼 그도 깜짝 놀라 예전처럼 나를 돌아봐 줄까. 내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고 남몰래 아파트 발코에서 날 내려다보던 그때처럼. 하지만 난 그럴 수 없다.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저 멀리, 모두가 부르는 이름의 또 다른 내가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퍼지는 일방통행로 위를 스쳐 지나가는 걸 난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가 좋아하지 않는 4월의 비가 오늘만큼은 내 몸의 먼지를 씻겨 내려줄 것만 같았다.


녹산로 유채꽃길. 2017.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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