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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의 모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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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득 이른 새벽에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위대한 영감이나 꿈꾸던 이상에 휩쓸려서가 아니었다. 그날은 설 연휴가 시작되는 때였고, 아침에 고향으로 출발하려던 것을 이른 새벽으로 앞당긴 것뿐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새벽 네 시에 출발해도 차가 밀릴 것이라는 교통 예보가 나의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시간을 앞당긴 것뿐이었는데도 나의 마음은 한결 새로워졌다. 명절마다 반복되는 도로 위의 지루한 정체가 아니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대양의 파도를 향해 돌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른 새벽, 그러니까 새벽 두 시에 출발한다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새벽 운전이라는 모험 앞에 들뜬 기분이 되었다. 


이런 모험에 커피가 빠질 수는 없었다. 출발이 조금 늦어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는 커피를 만들었다. 추운 날씨를 대비해 특별히 더 뜨겁게 데운 커피를 컵에 담았다. 뚜껑은 닫지 않았다. 주차장은 멀지 않았으므로 뚜껑을 닫지 않은 게 큰 문제가 될 리 없었다. 난 더 이상 팔과 몸을 아무렇게나 흔들고 다니는 어린애가 아닌 것이다. 자동차를 예열하는 동안 운전석에 앉아 커피를 마실 생각에 내 마음은 들뜨기 시작했다. 이제 한 손에 컵을, 다른 한 손에 캐리어를 쥔 채 밖으로 향했다. 


밖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비바람이 일고 있었다. 번개만 내리쳤어도 로빈슨 크루소와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바다에서 마주쳤던 그 밤을 떠올렸었으리라. 하지만 날이 그렇게 고약하지는 않았다. 난 커피를 쏟지 않겠다는 일념하에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상처입은 아스팔트가 물결을 일으키듯 요동쳤고 갑자기 몰아치는 바람은 바닷가의 그것처럼 자신을 위장했지만 나는 갑판에 우뚝 솟은 마스트처럼 굳건히 선 채 이 모든 것에 저항했다. 나는 가끔씩 컵을 바라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그것은 안전하게 그곳에 있었다. 양이 조금 줄어든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움직이면서 조금씩 커피를 마신 탓이었다.


스릴러 감독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치 중 하나가 아주 어두운 곳에서 간헐적으로 비치는 작은 광원 효과일 것이다. 한 바퀴씩 돌며 주변을 비추는 밤바다의 등대나 감옥의 감시탑을 상상하면 좋다. 처음 빛이 지나갈 때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빛이 지나갈 때 갑작스럽게 그곳에 무언가가 등장한다. 내가 어두운 길을 걷다가 가로등이 미약하게나마 애를 쓰는 좁은 공간을 지나갈 때 비슷한 효과가 일어났다. 하늘에서 내리치는 번개가 급작스럽게 밝혀주는 인간사의 추악한 현장처럼, 저 위의 희미한 가로등은 내 가슴과 허리와 다리에 걸쳐 진흙탕처럼 엉겨 있던 갈색의 액체를 서서히 드러내었다. 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순간 액체를 손에 든 채 돌아다니다가 옷과 바닥에 내용물을 쏟곤 했던 수많은 과오의 반복이 떠올랐다. 에드몽 당테스는 나를 보며 이렇게 외칠 것이다. "너를 찌르는 것은 이 검이 아니라, 너의 과거다!"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자동차의 내부는 안전했다. 어렵사리 몸에 묻어 있던 액체를 모두 닦아낸 나는 자동차의 시동을 켠 채 남아 있는 커피를 홀짝였다. 부족하게나마 나의 소망이 성취된 셈이었다. 난 좀 더 오랫동안 내게 성공의 기분을 강요하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양이 남아 있지 않던 커피처럼, 마찬가지로 많은 양이 남아 있지 않던 연료 수치에 내 시선이 머물고 말았다. 연료는 많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남아 있지를 않았다. 이틀 전, 시내에서 정체라는 파도와 두 시간 넘게 지루한 싸움을 하며 입항을 지체한 탓에 연료를 거의 모두 소모해버린 것이었다. 연료를 미리 넣어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땐 조르바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아무렴 당장 기름을 넣지 않는다 한들 무슨 문제가 있으랴! 난 그때 그런 생각을 했다. 이곳은 서울이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야근의 도시, 하루 25시간의 서울. 주유소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나를 환영할 참이었다. 제노바로 가자. 안 된다면 피사로, 그도 안 된다면 팔레르모로. 베네치아까지 못 갈 것은 또 무엇인가!


하지만 얼마 후 나는 나탈리 레제의 다음 문장을 회상해야 할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집이 넓어봤자 무슨 소용이랴. 모든 것이 하나의 어슴푸레한 침실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고 마는 것을." 그러니까 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했던 것이다. "서울이 넓어봤자 무슨 소용이랴. 모든 것이 하나의 불꺼진 주유소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나고 마는 것을." 난 설 연휴라는 것을 과소평가했다. 그러니까 보통 명절 당일에만 쉴 뿐, 그 전과 이후의 연휴에는 영업을 하는 것이 보통이니 주유소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셀프 주유소든 일반 주유소든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아니, 주유소가 원래 새벽에는 운영을 하지 않는 건가? 아니면 설 연휴라서 그런 것인가? 난 이제 몇 킬로미터, 아니 몇 미터를 더 달릴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고, 그렇게 문 닫힌 주유소를 지나칠 때마다 조금씩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자칫 차에서 내려 손으로 차를 밀어야 할 판이었다. 베네치아가 눈앞에 있었지만, 부르치에 연결된 긴 체인은 항구의 입구를 틀어막은 채 나의 출입을 방해하고 있었다.


죽고 사라진 유명한 작가들의 자취를 답파하였던 사무엘 베케트나 조르주 상드는 반겨주는 주인이 없는 작가들의 집을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다녔었다. 장 자크 루소의 외딴 거처를 방문했던 르낭은 다음과 같이 외친 적이 있다. "마침내 보았습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옛 작가의 집을 방문하는 떨리는 마음 하나만은 나 역시 그들 못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내가 찾아다녔던 것은 잉크라는 기름 냄새가 떠도는 작가들의 집이 아니라 휘발유와 경유라는 기름 냄새가 떠도는 주유소들이었다.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 그곳을 방문하는 것은 결코 즐거운 경험이 아니었다. 그곳은 무인도였고 폐쇄된 항구였다. 난 도로 한가운데서, 터널 한가운데서, 올림픽대로 위에서 내 차가 서서히 멈춰서는 것을 상상했다. 어두운 밤, 비상등을 켜두었지만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한 뒷차가 나와 내 차를 들이받고, 그 사고 소식이 설 연휴 첫날에 뉴스 속보로 전해지는 것을 상상했다. 가뜩이나 길도 막히는데 사고라니. 사람들의 짜증 섞인 표정이 후사경에 떠올랐다.


난 내 운을 믿기로 했다. 운영 여부를 알 수 없는 서울 시내 주유소를 포기하고 곧장 고속도로로 향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주유소라면 설 연휴에 운영을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진 채였다. 그곳까지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런 불우한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믿음 속에서도 나의 오른발은 연비를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정속 주행, 브레이크는 최대한 밟지 않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운에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내 다소간의 노력은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연료를 채우고 나서야, 그제서야 난 진짜 바다로의 항해를 시작한 느낌이 받았다. 출항하자마자 닥쳤던, 내 스스로 일으켰던 어리석은 위협이 내게 합당한 충고를 하고는 무대 밖으로 퇴장하는 듯했다.


이제 시간은 새벽 세 시 반이었다. 새벽 네 시부터 시작될 거라는 고속도로 정체를 삼십 분 앞둔 시각이었다. 이렇듯 새벽에도 쉽게 끝나지 않을 모험에 동참한 나에게, 사실 출항의 명확한 목적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가 명절만 되면 집을 떠나 항로를 따라 이동했던 이유는 설명절이란 바로 그런 날이라고 정해져 있었고, 모두들 그 규칙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만일 어떤 이가 설명절이 아닌 그 일주일 전에 고향을 방문하였다면, 그리고 그 방문을 이유로 설명절에는 고향에 가지 않았다면, 그의 부모는 자식이 일주일 전에 이미 자신을 방문하였음을 주변에 변명처럼 늘어놓아야 하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설명절 당일의 허전함은 부모를 부덕과 상대적인 소외로 이끌 것이다. 설명절이란 그런 날이기 때문이다. 몰로이의 혼잣말을 떠올려 보자. "그때 속삭임이 다시 들려왔다. 침묵을 다시 가져오는 것, 그것이 사물들의 역할이다." 우리는 지루한 반복을 예견하면서도 명절만 되면 몸을 움직인다. 그 행렬에 뛰어든다. 사물이란 정체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도로 위의 저 위대한 정체에 위안이 스며든다. 그 위안은 길이 막히는 도로에 멈춰 서 있는 것이 자신만은 아니라는 동질감이다. 달이 완전히 이지러졌다가 초승달이 되어가는 특정한 시기에, 친인척들이 모이는 특정한 장소에서, 모두가 공유하는 흔치 않은 축제가 벌어진다. 명절 특유의 그 정겨운 지루함은 그날도 공동체의 선의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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