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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침 소리라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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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들을 하다 보면 가끔씩 정신이 멍해지거나 해야 할 일들이 목록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탄지마트나 Paroxysm 같은 단어들을 끊임없이 머리에 집어 넣고 난 뒤, 공문을 하루에 몇 개씩 기안하고 난 뒤, 왼쪽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밀어걷기를 하고 돌아온 뒤, 그러고 나면 이제 뭘 해야하는지 갑자기 혼동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땐 다이어리를 살펴 보곤 했다. 키보드에 가득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보기도 했다. 그러다 그 포스트잇을 한 장 두 장 떼어 내게 될 때, 다이어리에 삭제선을 긋고 새롭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게 될 때, 그때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기분이 찾아듦을 느꼈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았다. 때론 무언가에 떠밀려 정신 없이 달리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럴 땐 얼른 발걸음을 멈추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돌아봐야 했다. 그럴 땐 얼음을 동동 띄운 인스턴트 커피가 좋은 친구가 되어주곤 했다. 때론 기차에서 받은 눈가리개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영화도 나쁘지 않았다. "Some men get the world. Others get ex-hookers and a trip to Arizona." 어제 본 영화 말미에서 킴 베이싱어는 그렇게 말했다.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본 스포츠 뉴스에서는 로저 페더러가 윔블던 6년 연속 우승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왠지 팔이 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키보드 포스트잇에 '테니스'란 세 글자가 붙어있음이 생각났다. 그것도 두 군데에. 난 하나를 뜯어서 대충 접은 다음 휴지통에 버렸다. 그 하나도 언젠가 사라질 것임을 알았다. 그러다 문득 창 밖의 흐린 하늘 아래 어두운 도시에 시선을 돌리고는 그래도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땀에 뒤범벅이 되어 숨을 몰아 쉴 때, 파일 속 내용들이 조금씩 구체화되어 갈 때, 레이몬드 챈들러의 연보라빛 페이지들이 하나둘 넘어갈 때, 늦은 저녁 혼자 걸어가며 작은 슈퍼에서 산 빵을 아작아작 씹어먹을 때, 불이 완전히 꺼진 커다란 사무실에서 밖을 바라볼 때, 오늘 하루만큼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난 음악을 들을까 했다. 그러나 곧 손을 멈추었다. 음악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맞는 음악을 찾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어두운 이곳에 나 이외엔 아무도 없음이 시계의 초침소리와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커피와 눈가리개가 나를 불렀다.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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