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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파괴된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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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도시, 로마에 온 걸 환영합니다. 이 환영인사가 의아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로마는 위대한 제국의 이름이자 수도였고 심지어 그 자체였으며, 지금도 한 나라의 수도인 곳이다. 르네상스 시절부터 새롭게 이어져 온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그보다도 훨씬 이전에 건설된 판테온을 보라. 물론 파괴된 지역도 있지만 그곳은 일부일 뿐이다. 타당한 주장이다. 하지만 많은 여행자들이 여전히 로마의 파괴된 흔적에 매력을 느낀다. 그들의 성향이 반사회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좋다, 로마에 왔으니 키케로의 말을 빌려 보자. "사실 사람이 행복한 것은 경솔의 동류인 희열, 쾌락이나 담소, 유희 속에 있을 때가 아니고, 비애 속에서 견고성과 지조를 지킬 때이다." 키케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으나, 로마를 방문했던 많은 여행자들이 파괴된 장소에서 옛 영광과 그 덧없음을 더듬어 보려고 했다는 걸 부정할 필요는 없다.

 

멀리 한국에서 찾아온 이국의 사람들에겐 이 파괴된 장소의 처절함이 더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세계사 과목은 언제나 고등 교육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고, 따라서 로마 제국이 멸망한 시점 이후의 이탈리아 반도는 우리에겐 장막 안의 물건과 마찬가지였다. 번성하던 시기의 로마는 잘 알아도 쇠퇴한 이후의 로마를 잘 모르는 우리는 언어장애라는 심각한 장벽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그 상태에서는 파괴된 도시가 던져주는 시각적 충격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다시 외쳐 보자. 파괴된 도시, 로마에 온 걸 환영합니다.

 

로마에 도착한 우리의 눈은 먼저 콜로세움을 향한다.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엔 감탄이 어렸으나 그 이상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영화에서 본 그 모습을 떠올리며 이곳에서 죽어갔을 검투사들을 상상해 보기도 하지만, 영화와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에 당황하여 좌우를 두리번거리기 급급하다. 검투사들이 자유를 걸고 싸웠을 콜로세움의 바닥은 발굴이 한창인지 모두 파헤쳐져 있고, 그것이 마치 짐승에게 물어 뜯긴 피부처럼 느껴져 고대인들의 잔인함만 더욱 드러내는 듯하다. 플라비우스 원형극장과 콜로세움이 같은 건축물을 뜻한다는 걸 모르는 우리는, 왜 안내판에 콜로세움에 대한 설명은 없고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에 대한 장황한 설명만 있는지 의아해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을 콜로세움이 아닌 그 주변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과 포로 로마노로 향하게 해보지만 그것 역시 녹록지 않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고대 로마에 속하는 것들이었으니, 고대 로마에 관해 뽐내보려 했던 지식이란 사두정치나 밀비우스 다리 전투를 언급할 즈음에선 고개를 숙이게 되고, 부서진 기둥 세 개를 가리키며 이것이 베스파시아노 신전이라고 말하는 안내판을 보게 될 즈음엔 부끄러움에 완전히 입을 다물게 되기 때문이다. 그 침묵은 파괴된 포로 로마노의 황량함과 우리의 무지를 더욱 부각시킨다.

 

자, 말도 안 통하는 북방의 야만족들이 로마를 포위하고 약탈했던 5세기의 그때를 생각해 보라. 1,500년이 지난 지금, 쿠리아 루리아를 눈앞에 두고도 그것이 원로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국의 언어를 간신히 떠듬거리는 21세기의 검은 머리 야만인이 여기 서 있다. 그러나 로마여, 걱정 마시라. 우리는 21세기의 새로운 파괴가 아니라 평화와 안녕을 위해 이곳에 왔으니.

 

우리는 그 안녕을 팔라티노 언덕에서 찾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고대 로마 황제들의 이름이 적힌 라틴어 판석에서 도망쳐야 한다. 우리는 서둘러 광장 왼편에 있는 팔라티노 언덕을 오른다. 그곳엔 의자가 있고 나무 그늘이 있고 바람이 있다. 그 언덕에 서서 파괴된 포로 로마노와 그를 품고 있는 로마, 그리고 그 도시를 가로지르는 테베레 강을 내려다 본다. 

 

어쩌면 우리의 눈은 우리가 잠시 후에 찾아가게 될 캄피돌리오 광장과 판테온, 스페인 광장을 스쳐 지나갔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린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눈은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그곳이 곧 우리가 다시 내려가 둘러 보아야 할 곳인 탓이다. 이렇듯 우리의 정신은 멀리 비행하지 못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추락하고 만다. 그러나 그때 이 파괴된 로마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위로를 건넨다. 위대한 정신을 지녔다던 세네카, 키케로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생각해 보라며. 다시 없을 황제, 카이사르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떠올려 보라며. 최후의 로마인이자 철학자라는 보에티우스의 마지막은? 자, 그들이 먼 미래를 기약하며 만들었다던 거대한 건축물들의 결과가 여기 눈앞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위대한 로마를 옆에 두고도, 팔라티노 언덕을 걸어다니던 눈앞의 흔하디 흔한 갈매기에 오랫동안 눈길을 주었던 걸 부디 이해해 주시기를. 바람에 간신히 실려갈 정도로만 조용히 속삭여 보자. 우리가 서로를 안을 수 있었던 건,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당신이 있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큰 소리로 읽지는 마시라. 로마 제국의 거대한 정복자들이 그 소박한 꿈에 놀라 몽둥이를 들고 일어설지도 모르니.

 

충분한 휴식을 취한 우리는 팔라티노 언덕을 내려간다. 파괴된 도시가 간직하고 있을 무언가를 마저 둘러보기 위하여. 그리하여 우리는 야만인으로 도착하였으나 어제보단 나은 야만인으로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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