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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공주에 대한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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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끔씩 동물의 시체와 마주친다. 그들은 대부분 차에 치어 죽은 야생 동물이거나 오염된 쓰레기를 먹어 죽은 버려진 동물들이었다. 오늘은 길을 걸어가다 고양이 시체를 보았다. 갈색 털 가진 그 고양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大)자 모양으로 길가에 처참하게 엎어져 있었다. 난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하며 그의 주변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래서, 또 그녀 생각이 났다. 난 길에서 죽은 동물의 시체를 보면 항상 그녀가 생각난다. 인라인 스케이트를 함께 타고 난 뒤 돌아오던 어느 날, 우리는 도로변에 죽은 채 쓰러져 있는 고양이 시체를 발견한 적이 있었다. 난 그 시체에 기겁하여 얼른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시체를 저렇게 무심하게 방치할 수 없다며 어디선가 긴 막대기를 가지고 와 그 시체를 다른 곳, 사람들의 눈길이 잘 띄지 않는 어느 곳으로 옮겼다(이건 선사시대부터 내려온─하지만 나에겐 사라져 버린─죽은 유체에 대한 성스런 의식의 일부이다). 아마 그곳에 동물이 아니라 사람의 시체가 있었더라면 나는 호들갑을 떨며 이곳 저곳에 연락을 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달리, 그녀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심지어 사물에게까지 같은 애정을 주려고 하였다.

그녀는 학교내 도로 위를 기어다니는 지렁이를 보고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비가 온 다음 날이면 도로는 어딘가로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지렁이로 가득 했는데, 그녀는 저 지렁이들을 그대로 두면 지나가는 차나 사람들에게 밟혀 죽을 거라며 그들을 모두 흙으로 옮겨주곤 했다. 비단 지렁이뿐만이 아니라, 건물 안에 갇힌 벌이나 새들을 보면 그들을 탈출시켜주려고 노력하곤 했다(당연한 얘기지만, 어린 그녀는 자신의 그런 모습에 스스로 힘들어 할 때도 있었다. 가치관은 밀물과 썰물처럼 오갔으며, 그때마다 그녀의 배내옷을 벗어내고자 노력하였다). 

그녀에겐 그렇게 보다 밑의, 보다 무거운 삶을 지향하는 모습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 많은 장난꾸러기 공주의 모습을 할 때도 있었다. 나 때문에 처음 접한 온라인 게임에 생각 이상의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고, 내가 들려준 린킨 파크의 세 번째 앨범에 “얘들 음악은 항상 똑같네.”하며 차가운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하지만 노래방에서 「jn the end」를 부를 정도로 린킨 파크를 좋아하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카페에 들어가서 아페리티프를 한 잔씩 하면서 자신이 자유롭다는, 다른 사람들처럼 기계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했던 사람들처럼, 그녀는 문화를 소비하길 원하기도 했다. 뭇 남성들부터의 인기 또한 그녀가 장난꾸러기 공주가 되는데 한몫을 했다.

그녀는 너무 흔하다는 이유로 「Hotel California」를 듣지 않았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봤다는 이유로 「타이타닉」을 보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볼게.”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확실히 공주다운 면이 있었다. 누구는 그것을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생각한다. 결혼하지 않은 모든 젊은 여성들에겐 '스스로' 공주가 될 권리가 있다고. 특히 위로 두 오빠를 둔 막내둥이 그녀라면 말이었다(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결혼 이후에는 남편에게 그녀가 공주가 되느냐 마느냐가 달려있다). 한때 그런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 적도 있지만, 그래도 난 그녀의 그런 도도한 면을 언제나 대단하게 여겼고 또 존경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공주는 지금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라는 글을 썼듯, 나도 지금은 없는 공주에 대해서 글을 쓴다. 쓰러진 동물의 시체에게서, 지렁이에게서, 노트를 펴면 들어있는 그녀의 쪽지에서 나는 아직도 그녀를 떠올린다. 하지만 너무 약한 인간들이 거부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듯, 나는 내 마음속에 공허를 만들고 그를 채우려 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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