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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유년 시절의 현현(顯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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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유년 시절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 시절, 난 아무 생각 없이 살았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살았으므로 그 시절에 대한 생각이 없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얘기하려 할 땐 언제나 현현에 관해서 이야기 해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현현이란 추억으로 간직될 만한 어떤 것이 말이나 몸짓이나 생각 속에 갑작스럽게 발현하는 정신적인 현상이다. 1) 다른 사람도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에겐 그런 현상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다. 엊그저께, 부모님과 난 처음으로 함께 테니스를 치러 가게 되었다. 어머니께서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난 마냥 기다리기가 심심해 테니스 공 하나를 손에 쥐고 상가건물의 벽에 던지기 시작했다. 공이 튕겨서 다시 오면 그를 잡고 다시 던졌다. 지나가던 한 여자 꼬마아이가 손가락을 빨며 그런 내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너도 한 번 던져 볼래?”라고 말을 건네려다가 내가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관두었다. 그렇게 공을 던지기를 몇 번, 그때 갑자기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아마 1980년대 말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5층 아파트에 살았다. 그때 내가 하던 놀이란 어디서 테니스 공 하나를 가지고 와서 아파트 꼭대기를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나의 또래들은 그런 짓을 하며 놀았다. 한 명이 공 하나를 쥐고 아파트 꼭대기를 향해 공을 던지면, 마치 전염병이라도 번지듯 주변의 다른 아이들도 그곳을 향해 공을 던지기 시작했다. 가장 좋은 것은 옥상으로 공을 넘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아파트의 가장 높은 곳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가장 높은 부위에 공이 맞기라도 하면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어깨가 으쓱해지곤 했었다. 공이 어쩌다가 옥상으로 넘어가면 한 아이가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를 향해 공을 던졌다. 나도 한 번은 옥상으로 올라가 아래를 향해 공을 던졌는데, 그것은 위를 향해 공을 던질 때와는 참 다른 느낌이었다. 공을 힘차게 던질 수가 없었다. 아래를 바라보면 땅이 나를 빨아들이는 느낌이어서, 공을 힘주어 던지면 공의 힘이 너무나 세 어떤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비록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도 난 공을 세게 내던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래를 보기만 해도 절로 손에서 힘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공을 힘껏 던지면 나도 공과 함께 떨어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 그때의 날 사로잡고 있었다.

그때의 난 무언가를 던지는 것을 참 좋아했던 것 같다. 야구를 한답시고 공을 던졌다가 뒷집 유리창을 깨먹었고, 아파트 내에서 돌팔매질을 하다가 지나가던 자동차 유리에 상처를 내기도 했다(참 우연찮게도, 그 차엔 우리 어머니가 타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발코니에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가 어느 한 곳에 아이들이 모이는 것이 보이기라도 하면 나도 얼른 그곳에 끼어들어 그때 당시 ‘오재미’라고 부르던, 콩주머니를 던져 맞추는 놀이를 하자고 애들을 꾀곤 했다. 왜 이런 기억이 갑작스럽게 떠오른 걸까? 알 수 없었다. 현현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

그때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열병 같은 것이 있었다. 학교와 학원의 시간은 잠이라도 자듯 어기적거렸고, 그것들이 끝나면 시간은 백미터 주자라도 된 듯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해가 지면 뛰놀기를 멈춘 뒤 저녁을 먹었고, 잠시간의 즐거운 만화 시청 시간이 끝나면 난 그날의 숙제를 했다. 어찌 보면 반복적인 하루였지만, 그 때는 무언가로 항상 들떠 있었다. 친했던 아이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서인지, 좋아하던 여자애가 보고 싶어서였는지, 다른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그 때 난 아무 생각 없이 살았으니까 말이다.

어느 날, 난 아파트 꼭대기가 아닌 저 푸른 하늘을 향해 공을 던졌다. 공이 구름 밖으로 날아가 버리면 어쩌지 걱정을 하며 힘껏 던져 올렸다. 힘껏, 더 힘껏. 세게, 더 세게. 하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은 땅바닥에 떨어져 다시 하늘로 튀어올랐고,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1)『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욺김(열린 책들, 2005). 389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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