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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는 먼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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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한 시간 전에 마셨던 커피의 맛을 잊지 못해 난 다시 캔 커피를 하나 뽑아온다. 따악. 너무 많이 마셔 더 이상 혀로 녹아들지 못할 커피 분말의 쓴 맛을 생각하면서도, 난 소리를 죽여가며 살며서 캔 뚜겅을 딴다. 조심스럽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갈색 방울들이 그 주변으로 날아가 용기 표면에 길다란 흔적을 남긴다.

채도가 낮은 파란 하늘은 그 흐린 기운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다. 가끔씩 떠가는 흰 구름은 그 푸른 하늘과 섞여 하늘의 채도를 더욱 낮춘다. 그 때문일까. 때는 이제 가을인데 나무들은 벌써부터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려 하는 것 같다. 난 마치 겨울로 접어드는 하루를 겪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이제 더이상 매미 울음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익명의 누군가가 쓴 아름다운 글을 발견한다. 자신의 삶을 관조하는 그 차분한 문장들을 보며, 마음에 드는 어떤 사람을 발견했다는 즐거움에 들뜬다. 하지만 그 글의 마지막에 써 있는 '무슨무슨 책의 누가 씀'이라는 문장에 기운이 빠진다. '아, 이 사람이 쓴 글이 아니구나.' 그래도 난 좋은 작가를 한 사람 또 알았다는 것에 만족한다. 하지만, 난 이제 글을 읽기 전 그 내용을 누가 썼는지부터 확인한다.

사람들을 생각한다.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은 한 여자를 사랑하다 죽은 이름 없는 장교, 감옥에서 글을 쓰는 저명한 학자, 자신의 죄를 참회하며 평생 얼굴을 가리고 사는 한 사내, 남편을 잃은 뒤 모든 인연을 끊고 칩거 생활을 하는 한 아름다운 과부에 대해서 생각한다. 전쟁에 나가 죽어버린 젊은이, 잊혀진 조각가, 정착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바람둥이에 대해서 생각한다. "너와는 결혼하지 않아." 「아비정전」의 쌀쌀맞던 '아비'의 대사에 대해서 생각한다.

얻어갈 거라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대해서 생각한다. 생활 정보, 정치 소식, 예술평, 좋은 책 소개, 아름다운 여행지 소식, 전문적 정보, 그 어떤 것도 유용함도 존재하지 않은, 그래서 얻어갈 거라곤 쓸데없고 불필요한데다가 알아듣기도 힘든 개인의 감상이 전부인 이곳에 들러주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우연한 방문이 아닌, 잠깐 동안의 관심이 아닌, 3초만에 한 페이지를 모두 읽어버리는 사람이 아닌, 팔짱을 낀 채 냉소적인 시선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아닌,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어떤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없다면 이곳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는 생각과 불현듯 마주친다.

차가운 실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온도를 조절하지 못한 채 무작정 쏟아내는 에어컨의 바람에 조금씩 발이 시려온다. 이제 여름과는 작별이다. 곧 있으면 그간 쌓인 먼지를 탁탁 털어내며 긴 옷들이 세상 구경을 할 시간. 뜨거운 여름을 좋아하지만 또다시 맞이하게 되는 가을에 마음이 새롭다.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면, 나는 노트북의 키보드판 밑어서 올라오는 따뜻한 미열에 두 손을 묻은 채, 그 긴 겨울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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