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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뒤에 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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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것도 자신의 치명적인 진실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웠다. 그러나 말해야 했다. 어떤 불안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운명적 모순에 대해서 말이다. 그때, 난 주름살과 사랑에 대한 얘기를 빼놓을 수 없었다.

시간, 한때 그것은 친구처럼 여겨졌다.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모든 것들을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느는 것은 확신이 아니라 불확신이었다. 걱정 없던 것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불분명해졌다. 단지 불분명한 것뿐이라면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평가니 성공이니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은 아무리 불명확해도 나를 흔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은 달랐다. 다른 것이 아닌 사랑이 흐릿해졌을 때, 그 뒤에서 불안은 살며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사랑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오히려 진실일 테지만 그 진실은 언제나 공포를 동반했고 그래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명확해질줄 알았던 사랑은 그와 반대로 흘렀던 것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 같았는데 오직 사랑만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건 둘째치고, 난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당황과 놀라움이 나를 에워쌌다. 그럼 누굴 만나야 확신이 들까. 다음 사랑에도 마찬가지의 의심이 들진 않을까. 평생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어차피 확신이란 없으니 새로운 사랑을 찾기보단 지금의 불안을 안고 계속 사는게 낫지 않을까.

고민이 계속 될수록 그 고민은 사라지긴커녕 더욱더 의심의 덩어리를 크게 만들어만 갔다. 의심의 상자는 열기 보단 그대로 가두어 두는 것이 좋으련만 호기심에 한번 열려버린 그 뚜껑은 희망만을 남기고 닫히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과 그 사랑에 이어지는 끝없는 공포 사이의 갈등은 결국 공포의 승리로 끝나고 말아버렸다. 사랑에 대해 침묵하기를, 누구와 함께 하기보단 혼자 살기를, 그런 외로움 속에서 끝없이 잊혀지고 잊혀지기를 원하게 되고 말았다.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기보단 그 사랑 자체를 멀리하길 원하는, 그 상태에서 결코 깨길 원하지 않는 동면을 시작하고 말았던 것이다.

언제나 자유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자유, 자유로운 사랑, 그리고 포기하는 자유마저도. 그래서 봉투에 망설임을 넣은 뒤 서둘러 그를 봉한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들을 그 겉면에 남긴 채. 하지만 그 세계는 이미 어둡다. 그러므로 나는 조금씩, 조심스럽게 물 속으로 한 발짝을 내민다. 한 손엔 망각을, 다른 한 손엔 보류를 집어들고. 기묘한 홀가분함을 느끼며 차가운 물의 압력에 빠져든다. 경솔했던 그 모든 세월에 대한 미련을 버린 채, 여행 끝의 피로에 대한 걱정을 잊은 채, 익명의 몸으로 이미 어두운 세상 속으로. 그렇게 하여 타도되어야 할 의심으로부터, 온갖 즐거움 뒤의 공포부터─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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