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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사랑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09. 6. 2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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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서점에 갔다가 <현대세계의 일상성>이란 책을 한 권을 보게 되었다. 일상에 관한 책은 일상을 일상적으로 만들어 주지 않기에 특별한 법이다. 요즘 영어 공부를 이유로 계속 영어로 글을 쓰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한글로 쓰고자 한다. 영어로 쓰다간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들이 순식간에 다 날아가고 말 테니. 머릿속에 떠오른 일상에 관한 작은 단상은 영어 사용을 포기하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먼저 난 단어의 어감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단어에는 그 자체에 가치적 판단이 부여된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기계적'이라는 단어가 그렇다. 이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므로ㅡ그 단어가 쓰이는 특수한 분야를 제외한다면ㅡ'기계적'이 지칭하는 대상은 보통 바람직하지 못한 어떤 것을 가리키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계적 일상'이라는 표현은 현대인에게 친숙하면서도 불편하게 다가온다. 하루하루가 동일하게 흘러가는 반복된 일상.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상. 거기에 '기계적'이라는 표현은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인다. '기계적인 인간'이 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기계적 일상을 사는 사람을 기계적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은 인간이 기계적으로 변했기에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기계적인 무엇이 현대인에게 안정을 박탈하여 나타나는 것일까? 다르게 표현하자면, 현대인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할 만한 대상이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사랑의 대상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이 의문을 출발점 삼아 난 현대인의 특징 중 하나를 더 언급하고자 한다. 그 특징은 바로 자신의 주변 인물들과 동일해지길 바라는 동일성의 추구이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우리가 어떤 집단, 사물 안에서 눈에 띄지 않는 상태가 될 때 '현대적'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의미를 따른다면 현대인을 일정한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이라 명명해 볼 수 있다. 현대인은 정해진 유행을 좇으며 주변 인물과 동일해지길 바라고, 그 동질성에서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그로 인해 개성을 잃고, 여전히 자신의 개성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불안을 느끼게 된다. 

이 현대인들은 타인에게 개성을 버리고 유행을 따르라고 요구함으로써 자신의 안정을 되찾는다. 그러나 때때로, 주변의 강압에도 자신의 개성을 놓지 않는 소수의 인물에게서 자신이 놓친 무엇을 떠올리기도 한다. 과거를 회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잃어버린 '나'에 관한 회고는ㅡ나의 경우엔ㅡ주변 여행이나 지역 축제 참가**로 이어진다. 그 순간 일상은 현대인에게서 잠시 모습을 감춘다. 그러나 순간은 길지 않고, 우리는 이를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유행이 지배하는 견디기 어려운 세계에 '삶에의 의지'를 불어 넣어주는 것이 하나가 있으니, 그게 바로 내가 언제나 집요하게 이야기하는 사랑이다. 사랑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아주 많은 양의 공산품에도 "이건 그가 언제 사준 무엇"이라는 개성을 부여해 준다. 그가 사준 나무 인형, 그가 사준 음식. 사랑만큼은 일상 속에서도 특별해 보인다.

그런데 삶을 흥미롭게 하는 점이 하나 있으니, 그건 우리가 일상성을 혐오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없으면 불안해한다는 점이다.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매일 같이 지겹게 출퇴근하는 회사를 쉽게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도 그런 것의 일종이기에. 이런 감정을 앞서 말한 사랑의 영역까지 확장할 수 있다. '당신만을 사랑하오'라고 말하는 낭만주의자를 말 그대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대인의 사랑은 낭만주의자를 원하지 않는다. 낭만주의자에게는 일상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순간적으로 그에게 매혹되지만, 곧 그에게 결여된 일상성에 불안해하며 고민에 빠진다. 고민. 그 고민은 대체로 이러하다. 열정적인 사랑과 열정 없는 사랑은 같은 것이 아닐까? 남편과 애인의 차이란 결국 '한쪽은 일상 속에서, 또 한쪽은 비일상 속에서' 좌절하는 것 아닐까? 그에 반해 기계적인 것, 혹은 그로 인한 결과(상품)는 영속적이다. 그래서 그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놓을 수가 없다. 혐오하는 동시에 동경하는 것이다. 일상에 묻힌 현대인의 사랑은 언제나 이 주변을 맴돈다.

마지막으로 일상의 미덕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 미덕은 일상의 예측 가능성에 있다. 현대인은 '순수하게' 특별한 어떤 것을 원하지 않는다. 현대인이 원하는 특별함은 '일상적인 것 안에서의' 특별함이다. 현대인에게 항상 특별한 것은 특별하지 않은 것과 같다. 항상 특별한 사람은 오히려 괴짜에 가깝다. 특별함은 일상성 안에 존재해야 의미가 있다. 특별함은 비교우위의 차원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별하다고 해도 예측할 수 있지 않다면, 현대인에게 그 삶은 바다 위에서 표류하는 삶과 같다. 우리는 황홀경에 빠진 듯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그가 가진 배가 뗏목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고개를 가로젓는다. 우리가 왕자와 공주를 동경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들이 시작부터 유람선을 가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유람선은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우리는 그가 주는 안정감에 환호한다. 

우리는 바지를 찢고 소매를 적셔가며 뗏목에 올라타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해변에 머문다. 바다로 들어가는 이가 있으면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다가 뗏목을 놓고 얼른 이리로 오라고 손짓한다. 오늘도 우리는 언젠가 항구로 들어올 유람선을 기다리며 지친 마음을 달랜다.

2009. 6.


*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자정이 지난 시각이므로 어제저녁이라고 쓰는 게 맞겠지만 그대로 두기로 했다. 물론 난 '오늘'이나 '어제'라는 단어 자체를 쓰지 않음으로써 이런 귀찮은 문제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런 단어는 일기를 '일상적이지 않도록' 하는 특별한 힘이 있다.

** 이 책의 역자인 박정자 교수는 축제 또한 일상성의 정착과 함께 사라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오늘날의 (상업성이 배제된) 축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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