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자크 아탈리, <등대> 그리고 오역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6. 6. 25. 03:59

본문

1. 손전등 혹은 등대


오늘날 사람들이 전기문을 읽어야만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자크 아탈리의 <등대>는 23명에 이르는 위인들의 전기문이며 따라서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는 그 이유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찾는 방법 중 한 가지는 그 질문을 전기작가에게 돌리는 것이다. 자크 아탈리가 23인에 대한 전기문을 썼다면 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위인들 중 왜 그 사람들을 선정했을까? 단순히 발행부수를 위해 자극적인 인물을 고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인물들을 선정한 것일까?


다행히도 자크 아탈리는 서문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놓았다. 그의 대답을 한 줄로 정리하기 위해선 책의 제목이 필요하다: 그는 이 위인들의 전기를 통해 우리가 자신의 삶을 비춰줄 '등대'를 발견하길 바랐다. 


그가 선정한 인물들 중 순탄한 삶을 살았던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은 가망이 없어 보였으나 성공하였고, 성공한 듯 싶었으나 잊혀지거나 비판받았다. 더 나아가 잊혀진 듯 했으나 몇 백년이 지난 후 다시 지지받기도 했다. 아탈리는 독자가 이러한 그들의 인생을 읽으며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길 원했다: "이 책에 실린 사람들처럼 우리도 의지적이고 창조적이며 집념이 강한가? (혹은 그러길 원하는가?) 그들이 역사 속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획득하기 위해 겪어낸 불행들을 우리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난 그의 바람이 성공적일 거라고 보지 않는다. 자크 아탈리의 글은 전기문하면 떠오르는 슈테판 츠바이크처럼 수사가 화려하지 않았다. 번역된 그의 문체는 차분하고 감정이 섞이지 않은 설명조여서 독자의 감정을 두드리는 데가 없었다. 가령 토머스 아퀴나스가 자기 가족에게 납치되어 2년 동안 성채에 갖히게 된 일화를 흥미롭게 써내려가는 대신,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기 위해선 이런 장면을 강조해야하지 않았을까?) 말 그대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간단하게 서술할 뿐이다. 


게다가 읽기 쉬운 책이 결코 아니었다. 아탈리는 '교양 있는' 사람들을 이 책의 독자로 선정한 것이 분명했다. 그는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충분한 사전 지식이 있어야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썼다: "같은 시대에 키예프에는 블라디미르 모노마크의 권력이 들어선다. 이단이 기독교 세계에 계속해서 널리 확신된다. 카타리파 교리가 프랑스 남부 지방과 유럽의 다른 지역들에 퍼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육체에 대한 증오, 금욕, 고행을 권장하고, '완벽'에 이르기 위해 '콘솔라멘툼'이라는 성례를 받도록 요구한다"(129쪽)


이런 글을 쉴 새 없이 읽어나갈 때 독자들이 어떤 상태에 빠지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많은 독자들이 자신 앞에 드리워져 있던 어두운 길을 비춰줄 반가운 등대를 발견하기보다는, 다만 지루하고 어려운 역사책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 책이 특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크 아탈리가 왜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극적인 그들의 인생을 '유레카'의 순간처럼 알몸으로 외치지 않고 그저 차분하게 담은 것은 아탈리가 원하는 '성찰'의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우리에겐 등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등대는 그저 빛을 비춰주진 않을 것이다. 우린 그 빛을 그저 흥겹게 따라가기만 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 길이 따라가는 게 너무 쉬워서도 안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이, 자신이 선정한 인물들의 삶이 가벼운 흥밋거리가 되길 원치 않았다.


자크 아탈리가 보여주길 원했던 것은 가볍고 편한 손전등이 아니었다. 독자는 그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것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러나 만일 독자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리하여 쉽게 이 책을 덮지 않는다면, 독자는 파도와 맞서 싸우며 어둠을 가르는 거대한 등대의 빛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미 그의 책은 던져져 있다. 바로 우리 앞에. 그 거대한 등대를 발견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어쩌면 독자들 중 일부는 발견을 넘어 그 등대를 손으로 뽑아 올린 뒤 마치 손전등처럼 자신의 앞을 향해 이리저리 휘두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독자가 탄생하게 된다면, 자크 아탈리는 가히 자신이 원한 바 그 이상을 이룬 셈이다.



2. 등대의 은유


그런데 이븐 루슈드가 사망한 뒤 고국에서 곧장 비난받았으며 서양에서는 놀림받았다는 사실로 그가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보에티우스가 말년에 감옥에 갖힌 뒤 처형된 것 때문에 그를 패배자라 부를 수 있을까? 물론 그런 비난은 쉽게 벌어진다. 위인들뿐만 아니라 실수나 실총, 부진을 겪은 TV 속의 유명인사들은 그들의 인생이 이제 끝장나버렸다는 식의 비웃음을 자주 산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대중의 평가와 관련 없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 하나가 흥행에 실패했다 해도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일 뿐이다. 설사 훗날 그가 잊혀진다 해도 그렇다. 그들은 높은 곳에 도달한 적이 있으며, 비록 그 때문에 추락의 힘이 더 강하다 할지라도 그곳에 올라가보지 못한 이들이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게다가 그들은 곧,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재평가 받는다. 그러니 대중의 관심을 받는 이들이 그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여기에서 '등대'에 대한 은유 발견할 수 있다. 등대는 한 번에 사방을 비추지 않는다. 등대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바퀴를 돌며 빛을 비춘다. 따라서 빛이 비추지 않는 다른 곳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등대가 다른 곳을 밝히느라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어두워지면 비난이 시작된다. 이것이 등대의 한계라고, 등대 너는 실패했다고, 이제 등대는 없애버려야 한다고. 그 빛이 사방을 돌아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예견하지 못한 채.



3. 오역들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주어가 두 개라던지, 고유명사의 철자가 한 개씩 빠져있다던지)이 종종 보이긴 했지만 두꺼운 인문번역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문장을 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좋을 듯하다. '트리엔날레'를 3년이 아니라 30년이라고 표현한 부분(106쪽), 그리고 테오도리쿠스의 '처남'인 클로비스를 '처형'으로 잘못 표기한 부분(107~108쪽에서 반복), 그리고 1228년을 1128년이라고 잘못 적은 것(227쪽) 정도가 눈에 조금 들어왔다. 다만 '클로비스'라고 적어야할 부분에 '군도바트'라고 적어서 역사를 뒤바꿔버린 부분(107쪽)은 큰 실수라고 하겠다. 즉 스페인의 비지고트족을 습격하고 그들의 왕인 알라리크 2세를 살해한 건 부르군트의 왕 군도바트가 아니라 프랑크의 왕인 클로비스다.


그리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역은 아니다. 오판 정도일까? 자크 아탈리는 사실 24명의 '등대'들에 대해 썼다. 하지만 국내 번역서에는 한 명이 빠진 23인이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원서 제목에 명백히 들어가 있는 '24'라는 숫자를 원서 제목을 소개할 때조차 써넣지 않았다(원제는 <Phares. 24 destins>인데, 번역서는 <Phares>라고만 밝히고 있다). 이런 수법을 써가면서까지 번역서에 넣지 않은 인물은 일본의 근대화를 시도하여 결국 일본을 열강의 반열에 올리는 데 성공한 메이지 일왕이다. 그는 에도 막부를 제압하여 이름뿐이던 왕의 권력을 강화시켰으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였고 대한제국을 합병하였다. 우리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불행한 기간이었지만 세계사에서 볼 땐 놀라운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무엇이 두려웠던 걸까? 무언가가 부끄러웠던 것일까? 아니면 아탈리가 유독 메이지에 대해서만 한쪽으로 치우친 전기를 썼다고 판단한 출판사가 독자의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 독자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제외시켜버린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원서의 제목마저 바꿔가면서 독자에게 말 한 마디 없이 한 명의 인물을 제외시킨 선택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